[랭폴] 제목 없음
뮤지컬 랭보, 랭보와 베를렌느의 이야기.
ㅋ랭 ㅂ폴 노선을 기반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랭보와 베를렌느에 대한 개인적 해석과 덧붙임이 있습니다.
그들이 런던으로 도피해 있는 동안, 폴 베를렌느는 아주 글을 못 쓰지는 않았다. 가끔은 마음에 드는 문장 같은 것들을 적어내기도 했다. 그럼 랭보는 그걸 들고 꼭 물어봤다. 이 시 제목이 뭐야? 그 천재 소년이 제 시 같지도 않은 문장 덩어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폴 베를렌느는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졌다. 대부분은 이름을 얼버무리듯 말할 뿐이었고, 대충 지어내서 말한 제목을 랭보는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물론 그것들은 벽난로 속에 들어가 재와 불꽃, 연기로 제 명을 다했다.
"폴."
"으응, 랭보."
"저번에 쓰던 건 다 썼어?"
종이 위에 의미없이 글자들을 나열하던 손이 멈추었다. 뭘 말하는거야, 랭보?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체 말을 하며 다시 손을 놀려보았지만 글자는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잉크를 바꿀 때가 된건가. 괜히 잉크 탓만 하며 베를렌느는 종이 끝을 소극적으로 구겼다. 랭보는 파이프를 들고 허공에 연기를 뿜어댔다.
"왜 있잖아, 저번에 내가 마음에 들어했던 거."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
"초록."
초록. 그 소년의 입에서 정확한 제목이 나올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베를렌느는 내심 그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꽤 마음에 들었는데도, 랭보를 지켜보며 썼던 글이 그에 의해 읽히자 자신의 그릇된 욕망을 들킨 것처럼 수치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수치스러움은 울렁거림을 몰고 왔고, 뒤집어지는 속을 다스리려고 애쓰며 종이를 구겨 버렸다. 그리고 뭐라고 했더라, 다 쓰면 제일 먼저 보여달라고 했던 말을 기억해낸 베를렌느는 눈을 굴렸다. 그 다음으로 들라에가 방문했었고, 그리고….
"아니, 다 못 썼어."
"그래? 금방 다 쓸 줄 알았는데."
"…제목이, 마음에 안 들어서."
바보같은 말을 또 내뱉어버린 자신의 입을 한 대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랭보는 제목이, 하고 그의 말을 반복하다가 물고 있던 파이프를 털었다. 베를렌느의 시선이 바닥을 향하며 으응, 하는 짧고 의미없는 소리를 뱉었다. 변명처럼 몇 마디를 더 덧붙이려다, 이내 입을 다물어버렸다. 창 너머로 가스등의 흐릿한 불빛이 비쳤다. 랭보는 끝이 구겨진 종이 위에 적힌 글자들을 흘끔 바라보았다가, 고개만 끄덕였다.
"보여줄 수 있을 때 보여줘."
"…알았어."
폴 베를렌느는 직감했다. 결국 보여줄 수 없는 글이 되겠구나. 그나마 예전처럼 곤란할 만큼 보채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베를렌느는 버릇처럼 한숨을 길게 내쉬며 의자에 깊게 몸을 기대고 책상 위를 손으로 더듬거렸다. 랭보가 내려놓은 파이프가 손 끝에 잡혀서, 그것을 움켜쥐고 입가로 가져다 댔다. 연기와 알싸한 냄새가 입 안에 감돌기도 잠시, 큰 손이 파이프를 들고 갔다. 베를렌느는 고개를 들었다.
"랭보."
"또, 이상한 생각."
랭보의 손이 베를렌느의 머리 위에 얹어졌다. 몇 번 쓰다듬으며 움직이던 손이 이내 양 어깨를 감싸 내려왔다. 머리 위에 턱을 얹은 채로 랭보가 툴툴댔다. 담배는 피우지도 않으면서 왜 가져가? 서늘한 몸을 따뜻한 체온이 감싸자 베를렌느의 표정이 풀어지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랭보. 자꾸만 힘없이 이름을 불러대는 탓에 랭보는 파이프를 다시 내려두고 그를 제대로 감싸 안았다.
"왜 그러세요, 베를렌느 씨."
"그냥, …좋아서."
"싱겁기는."
"그러면 안 돼?"
아니. 머리칼을 손 끝으로 헤집다가 쪽 소리를 내며 이마에 입을 기습적으로 맞춘 랭보가 속삭였다. 당신이 하고 싶은 거 전부 다 해도 돼. 간지러운지 키득거리는 소리가 아래서 울리다가 이내 맞추어서 작게 말했다.
"랭보한테 빨래 시키기?"
"음, 그건 빼고."
소리내어 웃은 다음에는 아주 고개를 돌려 입을 맞추었다. 힘없이 손길 따라 움직이는 가느다란 목덜미와 창백한 뺨을 손으로 쓸면서, 입술이 다시 포개어졌다가 짧게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떨어질 줄을 모르고 붙어오다가, 더운 숨 때문에 흰 얼굴에 붉은 기가 올랐을 때에야 베를렌느를 놓아주는 소년의 모습은 아릴 정도로 가슴에 깊이 박혔다. 그 표정에 홀린 것처럼 베를렌느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오늘은 그만 쓰고 일찍 자자, 따위의 일상적인 말을 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뒤이어 밀려오는 죄책감은 그를 쓸어낼 것처럼 넘실거렸다. 그것을 피할 생각도 못하고 발목까지 적시게 두고 나서야 그는 해방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말이야."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 올라 젖은 발목을 털어내듯 손을 몇 번 휘적거리던 베를렌느를 보며 랭보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응? 짧은 대답이 이어졌다. 랭보는 흔들리던 불을 끄고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꼭 제목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잖아."
"제목이 얼마나 중요한데, 랭보. 그건 독자와 작가를 이어주는 최종적인 다리 같은 거야. 문장으로 치면 마침표 같은 거고. 그리고 제목이 없으면…."
"몇백 년 전엔 아무도 제목에 관심조차 없었어. 광장에 만들어진 조각상은 광장에 있는 조각상이었고, 성당 벽에 그려진 벽화는 그냥 벽화일 뿐이었잖아. 그렇다고 그것들이 의미 없는 그림이었을까? 아니지."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는 답을 채근하지 않았다. 베를렌느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방 안에 어둠이 깔렸지만 거리의 가스등 때문에 아주 어둡지는 않았다. 소년의 눈에 뜬 별을 볼 수 있을 정도로는 밝았다. 그래서, 시선을 떨쳐낼 수가 없어서, 숨이 막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내 말은, 제목은 거창한 것이 아니고 부가적인 것일 뿐이라는 거야. 판매장의 필요에 의해서 등장한. 그리고 시인은 그런 필요에 의한 규율을 거부할 필요가 있어. 무슨 말인지 이해해?"
"랭보…."
"당신이 쓴 제목, 난 나쁘지 않아. 그렇지만 그게 필요 없다거나 거추장스러우면 그냥 버려.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이건 당신 시니까."
"……."
"구기지 말고."
맨날 구겨. 그런 투덜거림이 섞였다. 베를렌느는 어두운 중에도 아주 오래 랭보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겨우 한 마디를 입에 담았다. 알았어. 아래로 떨어진 연인의 시선을 맞추어가며 대답을 기다리던 랭보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스쳤다. 걷힌 이불 속으로 몸을 누이고 구겨진 침대 옆 자리를 팡팡 두드려 펴주는 손길이 퍽이나 다정했다. 아, 이대로 언제까지나…
…도망쳐 있을 수는 없어.
그러나 아직은 괜찮을 것이다. 베를렌느는 랭보의 손을 더듬어 잡고 자리에 누웠다. 겨울밤에도 꺼지지 않을 따뜻한 손이 그를 감쌌다. 오랜만에, 그를 괴롭히는 목소리들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의미없이 포타를 켜놓고 나온 제목없음 보고 삘받아서 쓴거긴 한데... 진짜... 랭보 시 중에 무제가 있을줄은 몰랐네요. 완전 얻어걸렸죠? 무제 - 구십이삼 년의 주검들 이라는 작품입니다. 1870년 9월 3일 마자스 유치장에서 작성했다고 하고요... 아 ㅋㅋㅋㅋㅋ 더 찾아보니까 이게 랭보 첫 가출때 파리로 가는 기차를 무임승차 했다가 유치장에 갇혀서 쓴 시네요... 이장바르 선생님께 도와달라고 편지도 보내고요. 귀여워라...
고통 속에서 취해버린 위대한 인간들이여
누더기 옷을 입은 그대들의 심장이 사랑으로 고동치는구나
오래된 주름살 아래 그들을 재생키 위해
오, '사신(死神)'이 씨앗 뿌린 병사들이여, 고귀한 연인이여.
시의 일부분을 적어놓고 이만 마칩니다. 건강 조심하세요.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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