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폴]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있어봤자 1
뮤지컬 랭보, 랭보와 베를렌느의 이야기.
ㅋ랭 ㅂ폴 노선을 기반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랭보와 베를렌느에 대한 개인적 해석과 덧붙임이 있습니다.
우울함과 우울증, 그 외 정신 질환의 묘사, 자살사고에 대한 묘사 등에 유의해주세요. 저는 이 글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경각심을 가지고 있으며, 현실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글을 읽다가 우울감, 자살사고 등이 심해지실 경우 즉시 휴식을 취해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2020년에 작성한 글입니다. 저로서도 꽤 애착이 있는 글이지만 이제는 같은 감성의 시리즈가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밤이면 펜을 들었다. 붉은 태양이 넘실거리는 낮에 글을 쉽사리 쓰지 못하는 것은 베를렌느의 오랜 버릇이었다. 태양은 글을 쓰는 것을 방해하는 다른 것들처럼 손으로 잡아서 치워버릴 수도 없었다. 너무도 밝고, 따뜻하고, 뜨거웠다. 이카루스의 날개에 붙은 밀랍을 녹이고 그대로 그를 떨어트릴 만큼이나 밝은 대낮에, 제가 구사하는 어둡고 질척한 언어를 표현하려 펜을 놀리고 있노라면 베를렌느는 발가벗은 것보다도 훨씬 부끄러워 치부를 겨우 감추는 기분으로 종이를 구겨 아무 곳에나 던질 수 밖에 없었다. 태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죽어가다 겨우 사라졌을 즈음에는 내일 아침 해가 다시 뜨지 않기를 기도하며 종이를 붙들었다. 그러나 너무 당연하게도, 어김없이 태양은 떴다. 그 사실이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밤을 새워 글을 쓰고, 낮에는 커튼을 모두 쳐 놓고 잠을 잤다. 새로 산 커튼이 태양빛을 적절하게 가려주어서 겨우 잠들 수 있었다. 랭보는 밤에 자면 될 것을 굳이 낮에 이불을 껴안고 있냐며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태양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태양 가까이에서 살 수 밖에. 그러나 이끼는 태양 아래에서는 살 수 없었다. 그건 자연의 법칙이었다. 베를렌느는 자신의 주제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태양이 닿지 않는 그늘에서 제 몸을 뉘인 채 축축하고 더러운 곳에서 일평생을 보내는 것. 그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그래, 어쩌면.’
베를렌느는 오늘도 어김없이 창문을 활짝 열고─랭보는 늘 서재에 들어오면 공기가 칙칙하다며 창문을 열지 못해 안달이었으니─책상에 걸터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랭보를 보며 생각했다. 햇살 아래에서 빛나는 눈동자. 태양의 아이.
‘내게 너라는 존재는 너무 과분한 것일지도 모르겠어.’
금기에 가까이 다가간 인간이 어떤 끝을 맞이하는지 알면서도, 결국에는 금단의 존재에 손을 뻗는 기분이었다. 랭보를 보고 있으면 늘 그랬다.
‘태양에 가까이 닿고 싶어하는 이끼라니.’
가당키나 한가. 그러니 그 죄로 서서히 말라 비틀어져 죽어가는 수밖에. 베를렌느는 햇살을 등진 채 파란 하늘 아래에서 시를 쓰는 어린 연인을 바라보았다. 공기는 날로 버석해져 햇빛이 강해졌으나, 짧은 비가 몇 번씩 내리기도 했다. 여름이 오고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떤 기억들은 햇빛에 녹아내려 사라져도 좋을 만큼 볼품없었다. 날이 지나가며 여름 햇살이 강해질수록 그는 저 자신을 감싸고 있는 볼품없는 살덩이와 너절한 기억들이 모두 녹아 사라지기를 바라며 잠에 들었다. 그렇게 잠을 자는 시간이 길어졌다. 하루의 절반은 잠에, 또 절반은 술에 취해 있는 나날이었다. 랭보가 술을 뺏은 이후에는 절반 이상을 잠에 매달렸다. 해가 높아지고 길어지면 랭보는 어김없이 그를 바깥으로 꺼내려고 부던히 애를 썼으나 베를렌느는 햇빛에 닿으면 움츠러들 뿐이었다. 녹슬고 낡은 관절에 이끼가 낀 것처럼 팔다리가 무거웠고, 눈꺼풀은 자꾸만 내려갔다. 억지로 안아들거나 달래어서 집 바깥, 해가 잘 드는 벤치에 데려다 놓으면 그는 어김없이 졸기 시작했다. 그가 그저 잠이 많은 것이 아니고 졸려서 잠에 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랭보가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폴.”
다정한 목소리가 뺨을 스치듯 다가오면, 베를렌느는 깜빡 졸았다가도 으응, 하고 짧게 대답을 했다. 눈을 힘겹게 뜨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올려다보는 몸짓은 금방 사라질 것처럼 힘이 없었다. 랭보는 베를렌느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당신 또 졸았지, 요즘 너무 많이 자. 베를렌느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미안, 랭보. 자꾸 잠이 와서.”
밤에 잠을 안 자니까 그런 거 아니야. 랭보가 투덜대는 말에도 그는 느릿하게 웃기만 했다. 요즘은 밤에도, 낮에도 온종일 잠을 잔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괜히 심술이 나 하는 말이었다. 미안해. 머쓱한 얼굴로 대답하면 랭보는 이내 베를렌느의 상체를 끌어안아 제 품에 붙이고 말했다.
“많이 졸리면 가서 잘래? 깨우지 않을 테니까.”
베를렌느는 그 말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여기서 네가 시 쓰는 걸 보고 싶어. 그리 말하면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조금 걱정되는 표정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착하다, 랭보. 의자에 기대 랭보를 바라보던 베를렌느의 눈은 또 서서히 감겼다. 자꾸만 잠이 오는 것이, 완전한 죽음과 멀지 않다는 것을 베를렌느는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눈을 뜨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겠지. 그렇게 되면 드디어, 완전한 안식이 올 것이었다. 결국 졸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곤히 잠든 베를렌느를 소파로 옮겨 담요를 덮어주는 것은 언제나 랭보의 몫이었다.
그렇게 깨어나지 못할 것처럼 잠드는 주제에, 잠을 자는 시간의 팔 할은 악몽을 꿨다. 제일 큰 악몽은 말하기도 싫을 정도로 끔찍했고, 그나마 나은 악몽도 덜 끔찍한 것은 아니었다. 그 악몽에서 그는 소리치고, 울고, 절규했다.
"……허억,"
꼭 그런 꿈을 꿀 때는 랭보가 잠든 새벽에 깨어났다. 이불을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적신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떠 보면 옆에서 그에게 팔을 걸치고 아무런 근심도 없는 표정으로 잠든 랭보의 모습이 보였다. 달빛이 떨어지지 않아도 환하고 아름다운 피부. 발갛게 물든 소년의 뺨에 손을 대어 그 잠을 깨우는 것은 허락되어있지 않은 금기인 것만 같았다. 베를렌느는 몸을 덜덜 떨면서도, 쿵쿵 뛰는 심장을 움켜쥐고 헛구역질을 참아가며 다시 잠이 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러다 구부정하게 웅크린 몸의 끝이나마 겨우 랭보에게 닿을때는 생명의 온기가 느껴져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꼴사납게 한참을 소리 없이 울다 보면 기척을 느낀 랭보가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제 품에 당겨 끌어안았다.
“이리 와.”
그렇게 궁상맞게 눈물로 잠옷을 한바탕 적시고 지쳐야만 비로소 잠에 들 수 있었다. 랭보는 친절하게도, 그가 잠들 때까지 등을 토닥여주며 괜찮아, 하고 달래줄 뿐이었다.
한바탕 울고 난 다음날 아침에는 부드러운 스프와 빵을 먹었다. 온종일 잠을 자거나, 깨어 있어도 졸기만 하니 당연히 잘 들어가지는 않았다. 랭보가 빵을 세 개째 집어가는 동안, 베를렌느는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제 앞에 놓인 스프 한 접시의 표면만 조금씩 긁어 먹었다. 자꾸 그렇게 하면 억지로 먹일 거라고 으름장을 놓을 만도 했으나,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강압적인 태도가 아닌 것 같아 랭보는 말을 사렸다. 그저 깨작깨작 먹고 있는 베를렌느의 옆에 앉아 이따금씩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 먹는다. 속 괜찮아? 따위의 말을 해주었다. 베를렌느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면 고개를 살짝 숙여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럴 때에만 희미하게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르는 것이 최근에는 통 보기 드문 모습이라, 랭보는 미소를 따라 그의 뺨에 내려앉은 보조개만 살짝 손으로 매만졌다.
“나, 오늘 나갔다 올 건데. 산책. …같이 갈래?”
요 며칠은 계속해서 거절당했기에 랭보는 별 기대 없이 베를렌느에게 산책을 가지 않겠냐는 말을 건넸다. 그 말에 베를렌느의 표정이 굳자 아니야, 괜히 물어봤네. 밖에 해가 쨍쨍해서… 정도의 이야기로 말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나 베를렌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의 반응에 놀란 쪽은 랭보였다. 잠깐의 침묵 이후 정말 괜찮겠느냐고 말을 붙여오는 어린 연인에게 베를렌느는 미소까지 지어가며 괜찮다고 말했다.
“정말 괜찮아. …나도 가끔은 바깥에 나가야지.”
그 말에 랭보는 기분좋은 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태양 아래 빛나는 눈을 접어 웃고는 금방 준비하고 오겠다며 신난 발걸음을 침실로 옮겼다. 베를렌느는 랭보가 사라진 다음에야 말라빠진 다리─최근엔 거의 걷지도 않았으므로 근육이 빠져 걸음을 몇 발짝 옮기기도 힘이 들곤 했다─를 힘겹게 옮겨 거실 너머에 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종이와 펜이 필요했다. 새 종이와, 새 잉크. 제가 쓰던 이끼 끼고 더러운 책상 위에 올려진 비루한 종이로는 안 됐다. 베를렌느는 책상 사이의 갈라진 틈에서 꼭 버섯이 피어오르는 것을 본 것만 같아 소매로 틈을 세게 닦았다.
‘내가 쓰던 것들은 전부 삭아 문드러지는구나.’
집어든 종이 안에 쓰인 글자가 우울에 번진 것처럼 흐리게 보여 통 해독을 할 수가 없었다. 요즈음은 모든 것이 그리 보였다. 글자를 읽을 수가 없었고, 그림이나 물건 같은 것들도 초점을 맞추어 보기가 어려웠다. 정확히는, 베를렌느의 손에 닿은 것들은 전부 사그라들고, 볼품없이 무너지고, 우울에 잠겨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죽어갔다. 그리하여 그는 새 종이와, 새 잉크를 사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전할 말은 깨끗한 곳에 써야겠지.’
햇빛이 선명한 여름날, 베를렌느는 죽기로 결심했다. 랭보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소매를 걷으며 햇빛이 뜨거우니 당신은 긴 옷을 입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을 붙여왔다. 베를렌느는 고개를 들며 그저 웃었다.
랭보가 말한 대로, 바깥은 해가 아주 쨍쨍했다. 오랜만에 같이 걷는 시간이 꽤 신이 났는지 랭보는 뺨을 붉게 물들인 채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베를렌느의 걸음을 맞추어 걷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베를렌느의 손을 잡고 앞서 나가는 동안 그는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햇볕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의 마음 속에서 글자들이 떠올라 날아갔다. 너는 여기 있으면 안 돼.
‘그래.’
너는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야.
‘과분하지. 동의해.’
이곳을 떠나.
베를렌느는 그 글자들이 바다에 떠다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느리게 웃었다. 재촉하지 않아도 이미 방법은 전부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성공할 자신도 있었다. 랭보는 베를렌느가 웃는 모습을 보며 나오니까 기분이 좋지, 라 물었고, 베를렌느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리고 랭보가 손을 잡아왔을 때에는 따뜻한 손에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스르르 손을 뺐다. 랭보는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광장은 사람들의 소리로 생동감이 넘쳤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랭보 이외의─물론 베를렌느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를 제외하고─목소리에 베를렌느는 겁먹은 듯 몸이 굳어버렸다. 랭보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으나, 베를렌느는 조금이라도 큰 소리가 날 때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눈을 힐금거렸다.
"폴, 사람들은 당신을 잡아먹지 않는다니까."
랭보가 몇 번을 말해보았지만, 제어가 제 맘대로 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이렇게 무서워하는데 데리고 나오지 말 걸 그랬나. 그래도 햇볕을 보니까 조금 생기가 있는 것도 같은데. 낮이고 밤이고 어두운 방 안에서 온종일 잠만 자는 것 보다는. 싸구려 조명 아래에서 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보였다. 푸석하게 마른 피부며 홀쭉해진 두 뺨이 조금 신경쓰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많이 자는데도 다크서클이 심하네. 속으로 생각하며 랭보는 베를렌느의 손을 잡았다. 스르르 손을 빼내던 아까와는 다르게, 베를렌느는 매달리듯 랭보의 손을 잡고 겨우 한 발자국을 떼었다. 종이, 종이 사러 가자. 책방이 아니고? 으응. 어쩐지 결연해보이는 태도에 랭보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지만, 이내 알았다며 걸음을 옮겼다.
종이를 사고 나와서는 펜을 파는 가게에 들렀다. 만년필, 딥펜부터 잉크까지 진열대에 놓고 파는 가게였다. 잉크를 고르는 베를렌느의 눈은 진지했다. 술이라면 아무 싸구려 술이나 고르는 정도의 안목을 가진 그였지만─그래도 압생트를 제일 좋아하긴 했다─잉크는 직접 마시는 것이 아닌데도 철저했다. 랭보는 베를렌느의 그런 면이 좋았다. 다른 것은 싼 것을 고를지언정 자신이 오래도록 사용할 것은 좋은 것을 고르는 섬세함. 싸구려 종이를 사더라도 펜과 잉크는 괜찮은 것을 사용하는 습관 같은 것들. 그리고 좋은 잉크를 고를 때의 베를렌느는 꽤 즐거워 보였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다. 겁에 질린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이것이 마치 인생의 마지막 고민인 것처럼 한참을 고민하며 두 병을 들고 바라보던 베를렌느는 이내 늘 쓰던 것 대신, 새로운 것을 골랐다.
"한 번도 안 써본 거잖아."
"그래서 사 봤어. 이제 예전에 쓰던 것은 못 쓸 것 같아서."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극도로 꺼리는 제 연인을 알았기에 랭보는 눈을 조금 크게 떴으나, 이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속으로 수긍하며 잉크의 값을 지불했다. 베를렌느는 새로 고른 잉크를 보며 눈을 반짝이는 랭보에게 차마 자신이 지금껏 쓰던 잉크는 이제 전부 곪아버려서 사용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할 수 없었다. 대신 베를렌느는 랭보에게 어울릴 것 같은 새로운 펜을 샀다. 나 펜 쓰던 거 있는데. 랭보의 말에도 그는 굳이 고집을 부려가며 튼튼한 만년필을 하나 샀다.
"좋은 펜 하나 있으면 좋잖아."
깊은 바다의 파란색을 담은 만년필은 촉이 튼튼하고 매끈해 보였다. 적어도 그 전에 쓰던 나무 펜보다는 훨씬 나았다. 펜에 이름을 새겨줄 수 있으면 더 좋았을텐데. 미리 이야기를 해둘걸 조금 후회했으나 랭보는 형형히 환한 웃음을 지으며 햇빛에 펜을 비추어보았다. 어찌 되었든, 새 펜을 선물받은 랭보는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음에 들어, 랭보?"
"그걸 말이라고 해? 정말, 많이."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를 너무 많이 맡아서, 아니면 다시 사람들이 활기차게 오가는 거리로 나와서, 어떤 이유에서건 랭보의 답을 듣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한 베를렌느는 입꼬리를 겨우 올려 희미한 미소를 띄우면서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베를렌느의 기색을 미처 살피지 못한 랭보는 그의 옆에 딱 붙어 들뜬 목소리로 새로운 시상이 떠올랐다며 이야기했다. 따뜻한 바람이 불고, 옆에는 랭보가 기분좋은 표정으로 말을 걸어오고, 햇볕은 흐려진 시야에도 보일 만큼 완벽하게 밝았기 때문에 베를렌느는 고개를 완전히 숙였다.
'이렇게 평온함으로 가득찬 풍경에 존재해도 되는 게 맞나. 적어도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닌 것 같은데.'
사람들의 말소리가 부드럽게 울리고 모두가 행복하게 걷고 있는 런던의 광장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 그래, 어울리지 않아. 아직도 욕심이 남았구나. 너, 글을 써야지. 마지막이 될 글을 써야지. 마치 가게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는 목소리 때문에 랭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끊기기를 반복했다. 베를렌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제 귀를 손바닥으로 막았다. 방금 전까지 편안하게 랭보의 온기를 전해받던 몸이 아주 차갑게 식었다가 뜨겁게 끓어오르기를 반복하고, 손바닥의 피부 아래로 메슥거림이 타고 올라왔다.
"…아무튼 당신이랑 이렇게 나오는 건 오랜만이네."
귓가가 멍멍해지고 눈 앞이 흐려진 탓에 랭보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아 베를렌느는 힘겹게 무어라 하였느냐고 되물었다. 애써 산 새 종이와 잉크가 문드러질 것 같아 들고 있던 종이봉투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그제서야 이상한 낌새를 느낀 랭보가 종이봉투를 집어들며 베를렌느의 팔을 주물렀다. 폴, 기분이 안 좋아? 돌아갈까? 베를렌느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했다.
"내가, 집에, …돌아가도, 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집에 가자, 폴."
고통은 강하고 빠르게 찾아왔고, 진득하고 느리게 빠져나갔다. 몸을 관통하는 것 같이 선연한 감각에 몸서리치며 베를렌느가 손을 뿌리쳤다. 이에 아랑곳않고 손을 다시 잡아챈 랭보는 손이 너무 차갑다고 중얼거리며 그를 부축했다.
사람이 오가지 않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오자 베를렌느는 조금 정신을 차린 것도 같았다. 미안해, 연신 중얼거리며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에 랭보는 한마디 얹으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대신 뺨을 양 손으로 감싸 시선을 맞추었다.
"폴."
"……랭보."
"나 봐. …이제 괜찮아?"
베를렌느가 대답할 틈도 없이 랭보는 뺨을 쓸던 손을 내리고 그 자리에 입술을 묻었다. 쪽, 소리를 내며 짧게 떨어지는 말캉한 감각에 베를렌느의 고통이 순간 멎었다. 숨을 헐떡거리다가 크게 뜬 눈으로 랭보에게 시선을 고정하자, 이번에는 입술에 입술을 맞대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호흡이 진정될 때 까지 한참을. 아무런 의사 표현도 하지 못한 채 베를렌느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간헐적으로 몸이 떨리는 것을 놓칠까봐 붙들으며 조용한 골목에 입을 연달아 맞추는 소리만 들렸다. 환청이 한 발 물러나고 베를렌느가 겨우 손을 들어 랭보의 어깨를 밀어내면 랭보는 순순히 떨어져 나와 그의 표정을 살폈다.
"…이제 괜찮아."
베를렌느의 모든 것이 불안정해지는 이유도, 안정되는 이유도 전부 그의 어린 악마 때문이라는 것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살고 싶어지는 이유와 죽고 싶어지는 이유 또한.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당장 자신을 방해하며 몸을 궤뚫던 고통은 사라졌기에 베를렌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로하는 데에는 서투른 티가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베를렌느는 다시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당분간은. 이런 추한 꼴을 알리고 싶지도 않았고. 말해줄 때가 올 것이다. 언젠가, 완벽하게 준비가 되었을 때. 랭보가 새 펜을 길들이고 적응되었을 때. 사실은 제 날개가 아주 오래 전에 꺾였노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베를렌느는 죽음을 준비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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