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폴] Blue rose day

<span class="sv_member">특별출연</span>
특별출연 @t6wI9Ba3UqSaAFO
2026-03-11 14:59

뮤지컬 랭보, 랭보와 베를렌느의 이야기.

ㅋ랭 ㅂ폴 노선을 기반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랭보와 베를렌느에 대한 개인적 해석과 덧붙임이 있습니다. 

유혈 묘사가 있습니다.  그다지 밝은... 글은 아닙니다. 사망 소재, 우울함과 우울증의 묘사, 자살 묘사 등에 유의해주세요. 저는 이 글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경각심을 가지고 있으며, 현실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글을 읽다가 우울감, 자살사고 등이 심해지실 경우 즉시 휴식을 취해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겨울(@barike04)님의 썰을 허락받아 글로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갓썰 정말 감사합니다...





똑.

천장에 맺힌 물이 베를렌느의 이마 위로 떨어져, 베를렌느는 눈을 떴다. 눈을 감고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시간이 조금은 지났는지 욕조의 물은 약간 식어있었고 몸은 나른했다. 베를렌느는 아무 의미 없이 욕조에 잠겨있는 것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기분 좋은 물의 온도 안에 들어가 있으면, 목욕이 끝나고 나면 눈을 뜨지 않아도 될까 조금은 기대하며 앉아있는 일도 많았다. 우울과 공허와 알 수 없는 쓸쓸함은 수용성인 것인지,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전부 녹아내려서 기분이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위안을 주는 것 같기도 했고. 랭보가 없는 시간에는 늘 그렇게 했다.


똑.

다시 물방울이 베를렌느의 눈가로 떨어져 눈가가 젖어들었다. 베를렌느는 눈을 깜빡이며 눈가를 나른한 손짓으로 부볐다. 물에 오래 잠겨있던 몸이 먹먹하고 무거웠다. 물먹은 솜 같네, 라는 생각을 잠시 하던 베를렌느는 그 말이 스스로 너무 우스워서 살짝 웃어버리고 말았다. 랭보가 들어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백 송이쯤 되는 새빨간 장미꽃을 들고, 그 소년은 서 있었다. 커다랗고 싱싱한, 가히 여왕의 꽃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활짝 핀 붉은 장미 꽃다발. 베를렌느의 시선이 나른하게 옮겨가다가, 그 꽃다발을 들고 있는 랭보에게로 가 멈추었다. 좁은 욕실이 꽃향기로, 그리고 수증기로, 그리고 랭보의 환한 미소로, 어지러울 정도로 메워졌다. 


"…랭보?"


이렇게 일찍 오는 건 오랜만인데. 랭보는 온종일 집 밖을 쏘다녔으므로, 저녁은 되어야 돌아올 것이었다. 런던에 있을때는 늘 그랬는데. 베를렌느는 의아함과 놀람에 몸을 슬쩍 일으켰다. 폴. 랭보가 그를 부르며 슬 웃었다. 일어나지 말고 거기 있어 봐. 어깨를 눌러서 그를 도로 앉히고, 랭보는 욕조 앞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피보다도 붉은 것 같은 장미의 색과 장밋빛으로 살갑게 달아오른 연인의 뺨. 베를렌느는 어이가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요 장난꾸러기."


똑.

랭보가 욕조맡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손을 뻗어서 장미를 만지작거리며 베를렌느에게 말을 걸었다. 폴, 오늘 내가 어디를 다녀왔게? 그러게, 어디를 다녀왔을까. 옷에서는 시끄럽고 지저분한 사람들의 냄새 대신, 갓 핀 장미 향과 풀의 냄새만이 기분 좋게 났으므로, 베를렌느는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어디를 다녀왔길래 이렇게 기분 좋은 표정을 할까. 폴. 랭보는 또 베를렌느의 이름을 불렀다. 베를렌느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손을 뻗어서 랭보의 손끝을 만지작거렸다가, 아이의 이야기에 집중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를 다녀왔길래 이리 뜸을 들여."


나 오늘 트래펄가 광장에 다녀왔어. 있지, 런던에서 가장 붐비는 그 광장. 커다란 탑이 있고, 분수대가 있는 곳. 베를렌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같이 자주 거닐던 곳. 입 밖으로 말을 꺼내며 중얼거렸다. 랭보는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곳. 거기서 새를 파는 꼬맹이를 봤어. 베를렌느는 새라고는 비둘기밖에 상상할 수 없는 얄팍하고 빈약한 상상력을 탓하면서, 최대한 귀엽고 깜찍한 새를 생각해보려고 노력했다. …오리라던가. 랭보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꽃을 파는 아이도 봤거든. 당신한테 줄 시가 생각이 나기도 했고, 그리고, 오늘이 로즈데이라고 하길래. 조금 챙겨봤어. 어때?


무엇보다도 근사해. 분명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눈앞에 있는 어린 연인의 행복한 모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눈에 담고 있는 것만으로 버거운 감각이 스멀스멀 밀려들어 와서 베를렌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렇게 평온한 순간이 얼마 만이던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도 간헐적으로 고통은 찾아왔기 때문에, 베를렌느는 붉은 장미와 태양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며 말을 잊은 것처럼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기만 했다. 폴, 나 말이야. 카이로에 가고 싶어. 나일강은 얼마나 넓을까?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래. 분명 그런 곳이니까 문명이 그렇게 발달했겠지…… 상상이나 돼? 이런 축축하고 음울한 도시가 아니라, 뜨거운 여름이 있는 나라. 너무 오래 더운물에 몸을 담갔던 탓일까,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하자 베를렌느는 랭보의 손을 붙잡았다. 랭보는 꽃다발에서 장미를 한 송이 건네주었다.


선물이야.


물로 축축해진 뺨을 장미로 쓸어내리다가 귓바퀴에 장미를 살포시 내려놓거나, 그대로 장미를 건네주며 랭보는 환하게 웃었다. 랭보가 환하게 웃었기 때문에 베를렌느도 평온하게 웃었다. 장미를 한 송이씩 건네며, 랭보는 끝없이 이야기 했다. 파란 하늘 아래에 바다가 얼마나 선명했는지, 새를 팔던 아이는 결국 새를 다 팔았다든지, 이집트에도 파란 하늘과 달과 별이 끝없이 펼쳐질 것인지, 그런 이야기들. 베를렌느는 장미를 받아들 때마다 장미의 향을 깊게 맡았다. 달큰하고 상큼한 향내가 코끝을 간지럽힐 때마다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랭보, 네가 준 거라 더 좋은 것 같아. 그렇게만 생각하며 그는 꽃잎을 한 겹씩 떼어내서 욕조에 떨어트렸다. 새빨간 꽃잎이 볼품없는 몸뚱이를 가리며 물 위를 덮었다. 폴, 아프리카에 가본 적이 있어? 아니. 한 번도. 사막에 가본 적은? 없어. 나는 그곳에 가보고 싶어. …당신이랑 같이. 갈 거지? 폴, 폴……


똑.

그렇게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면, 마지막 꽃의 마지막 꽃잎이 베를렌느에 의해 똑 떨어졌다. 이미 장미로 빽빽하게 덮여 수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 찬 욕조에 베를렌느는 마지막 꽃잎을 떨어트렸다. 랭보도 마지막 꽃을 건넨 이후로 말이 없었다.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는 두 눈이 천천히 손끝으로 내려갔다. 손을 쥐어 잡고 랭보는 베를렌느의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아주 오랫동안, 아니지. 아주 짧은 순간이었나.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만 있었다.


"…랭보."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형편없이 상해 있었다. 울음이 섞인 것 같기도 하고, 목이 멘 것 같기도 하고. 잔뜩 쉰 목소리가 베를렌느에게서 나왔다. 랭보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분에 그는 계속해서 이름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랭보, 랭보. ...니콜라, 랭보. 겁 먹은 아이처럼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 잡힌 손을 내려다보기도 하다가 랭보, 하고 다시 이름을 불렀다. 벌벌 떨리는 손끝을 다정하게 잡고 있는 랭보의 모습을 보며 베를렌느는 무력함을 느꼈다. 뺨을 어루만지려 손을 들려 했으나, 세포 하나하나에 기운이 빠지는 것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이내 포기했다. 그 대신, 나른해진 입술에 강하게 힘을 주어 단어 하나만을 중얼거렸다. Dear,


"랭보."


랭보는 미동도 없이 그저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줄 법도 한데. 왜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거지. 서러운 마음에 베를렌느는 울상이 된 얼굴로 랭보를 마주 봤다. 기어코, 천장에서 떨어지던 물방울처럼, 베를렌느의 뺨을 타고 눈물 한줄기가 흘렀다. 랭보. 긴 속눈썹을 늘어뜨리며, 랭보가 속삭였다.


…폴.

나 사실은, 아프리카에 갔을 때,


쾅!


욕실 문밖에서 커다란 소음이 들렸다. 진동과 시끄러운 소리와 무서운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


"…안에 계십니까!"

"베를렌느 씨, 저 …예요! 안에 계세요? …대답해주세요!"


중문을 부수는 것 같은 소리, 쨍하게 울리는 금속음, 욕실로 점점 다가오는 목소리들, 문을 달각거리는 소리. 울렁거리고 역겨운 불협화음. 온갖 시끄러운 소리들이 베를렌느의 평온을 방해했다. 또 환청인가, 베를렌느는 낮게 신음하며 눈을 꾹 감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려 허공을 응시하면, 시야가 온통 붉고, 흐리고, 까맣게 점멸하듯 타들어갔다. 물에 젖은 솜을 피 대신 채워 넣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무겁고, 먹먹하고, 환청인지 모를 것들이 자꾸만 생각을 방해했다.


랭보가 없는 시간에는 늘 그렇게 했다. 베를렌느에게는 이제 장밋빛 뺨을 붉히며 제게 살갑게 붙어오는 소년이 없었으므로, 그 말은 거의 모든 시간을 그가 욕실에 들어가 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욕실 옆에 떨어진 면도날과 붉게 물든 욕조와 장미 향인지 혈 향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럽게 코를 메우는 냄새와…….


"아, …랭보."


입 바깥으로 나올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는 없었다. 눈 앞이 자꾸만 붉어지고, 어두워지고, 붉어져서 까맣게 변하기 직전까지도 베를렌느는 홀린 것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니, 랭보를 보고 있었다. 비릿하고 찝찔한 향, 쏴아… 하고 들리는 귀울림 같은 파도 소리. 아, 런던의 바다. 금빛 태양. 좁고 음울한, 욕실 안에 매달린 싸구려 전등 아래에서도 그때 금빛 태양을 받던 것처럼 예쁘게 빛나던 랭보의 눈. 나의 연인,


"나의 랭보……."


로즈데이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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