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폴] 자기 소멸의 궤적 (하)
“그래도 내가 닦은 구두는 다를 거예요.”
“뭐가 다른데?”
“오래 반짝이거든요. 아저씨가 걷는 동안, 내내. 맘만 먹으면 골목 너머에서부터 존재를 알 수 있을 정도로.”
“걷는 내내?”
“당신이 걸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야.”
–좋아, 당신 마음대로 해. 난 계속 걸어갈 거야. …….폴, 당신도 계속 걷고 있었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이명, 아프리카에서 돌아올 때, 기차에서, 집에 혼자 남겨졌을 때 단 한 번도 속삭이지 않던 것들이…… 왜 지금? 머리를 짚고 눈을 감았다. 아저씨? 어린 목소리가 귀에 메아리쳐 아득히 먼 곳에서 울린다.
그리고 뱃고동 소리와 같은 기차 경적.
“랭보.”
이번에야말로 제게 질려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났을 거라 생각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 아이는 집에 있었다. 문을 열고 인기척을 확인하자마자,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쓱 닦아내고 억지로 웃었다. 읽고 있던 책에서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눈물이 한 방울 흘렀던 길을 지우지도 않고 랭보가 여상하게 왔냐고 묻는다. 그 태연한 모습은, 우리가 함께하면 불행해질 것을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조차 헷갈리게 만들었다.
“……랭보.”
“할 말 있으면 해.”
조금의 뜸을 더 들이고 나면 그가 책에서 눈을 떼고 얼굴을 바라본다. 미안하다는 말은 질렸어. 그건 빼고 해. 어린 얼굴에 짜증이나 질림의 기색이 있는지 초조하게 읽어낸다. 내 눈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알아챈 랭보가 한숨을 푹 내쉰다.
“할 말 없으면 말아.”
“……들라에는?”
“보면 모르겠어? 돌아갔어.”
“……미안해.”
“그런 말만 계속하려면 가서 잠이나 자지 그래.”
할 말이 없어 고개를 푹 숙인 채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랭보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앉아. 바보처럼 계속 서 있지 말고. 그 말에 냉큼 의자를 끌어다 옆에 앉았다. 앉고 나서도 어쩔 줄을 모르며 잠시 시선이 방황하다가, 종이로 시선을 두었다–Réduire l univers à un seul être, dilater un seul être jusqu à Dieu, c est l amour–우주를 단 하나의 존재로 축소하고, 그 존재를 신에 이를 만큼 확대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레 미제라블>이네.”
–사랑은 천사가 별들에게 보내는 인사다. 다음 문장까지 퍽 낭만적이지만, 소설 속 두 청춘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시대는 개혁의 파도와 함께 쓸려나가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며, 밤의 정원은 폭풍의 눈과도 같으니. 연인들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이 스스로 서로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책장을 느리게 넘겼다. 제가 읽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조용한 행동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는, 책을 함께 읽어내렸다.
초가 다 녹아내릴 때까지 책을 나누어 읽다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촛불이 훅 꺼졌다. 좁은 방 안이 갑작스레 어두워지고, 은은하게 타고 있던 벽난로의 노란 불빛만이 책의 윤곽을 차분하게 비춰주었다.
“새 초를 가져올게.”
“됐어, 이만 자러 가자.”
랭보가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쳤던 숄을 의자에 걸어 두고는, 나를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짧은 거리에서도 손을 내밀어 잡고 걷는 것이 습관이 된 지도 오래라, 군말 없이 손을 잡았다. 잠시만. 한 손으로 책을 책장 한쪽 구석에 쑤셔 넣고 그의 쪽으로 돌아섰다.
벽난로의 불빛이 소년의 머리칼을 비추었다. 소년의 눈 또한 태양에 비추어 빛날 때와 다름없이 여린 빛 아래서도 강렬한 빛을 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아주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런 말을 내뱉었다.
“랭보, ……넌 정말 이상해.”
“이상해?”
랭보가 반문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는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아…… 이렇게 붙잡고 있는데도. ……마치 신처럼.”
따스한 손이 차갑고 별 볼 일 없이 마른 손가락을 꽈악 쥐어왔다. 두 눈 안에서 빛나는 별과 시선이 마주친다. 눈이 멀 것 같아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영영 멀어버려도 좋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폴.”
“……응.”
“신이 되겠다고 한 적 없어.”
“…….”
“나는 인간이야.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곤 소년은 몸을 돌려 침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손에 이끌리면서, 동시에 그 발언이야말로 그에게 진정한 신성을 부여하는 말일 것이라고, 어렴풋이 느꼈다.
눈을 다시 떴을 때는 사방이 어두워져 있었다. 머리가 힘없이 지끈거렸고, 온몸이 피로로 젖은 것처럼 무거웠다. 왜 지난 시절의 꿈을 꾸었을까, 이제는 의미가 없을 텐데.
“아, 드디어 일어났네.”
아이는 마치 내가 잠시 졸기라도 한 것처럼 태연히 나의 얼굴을 바라본다.
“봐, 달이 태양을 거의 다 가렸어. 이제 아주 밝게 빛나는 별은 보이기 시작할 거야.”
“……또 이상한 꿈을 꿨어. 기억들이 여전히 맴도는 것만 같아.”
“음, 조금 걸을까? 구두도 다 닦았는데.”
여전히 태연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벌떡거리며 뛰던 심장과 징징거리며 울리던 머리가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다. 소년이 손을 내게 내민다. 무의식중에 그 손을 잡고, 참 따뜻하다고 느꼈다.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고 하늘을 바라보니 별이 쏟아질 듯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주 예전에, 그와 함께 보았던 월식에 비할 수준이었다.
“……별이 너무 많네. 너무 많아. 월식도 아닌데…….”
“아, 여긴 틈이니까. 그래서 더 잘 보여. 사실 이것보다도 더 많은 별들이 있을 거야. 보이지는 않겠지만. 저 너머에 생명을 멈춘 별들도 있고.”
“틈? 잘 보인다고?”
소년은 그저 웃었다. 이내 쥐고 있던 제 손을 끌어다가 어두워진 태양 아래에 빛나는 별을 가리킨다.
“저건 이미 끝나버린 별. 아직 반짝이고 있지.”
그리곤 또 다른 별을 향해 손가락질한다.
“이건 아직 살아있는 별. 꽤 희미하게 보이지 않아? 하지만 이렇게 별과 멀리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반짝이는 게 아니라 온통 번쩍거려서 살기 힘들었을 거야. 태양을 맨눈으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태양을 향해 날아가던 남자의 끝은 알고 있지? 소년은 실없는 웃음을 흘린다. 나 역시도 그에게서 웃음이 옮았는지, 입가에 미소가 희미하게 올라온다. 하늘을 보았다가 구두를 내려다본다. 반짝이도록 닦은 구두는 거의 하늘이 비칠 정도로 맑게 보인다.
“……한 별을, 맨손으로 잡고 싶었던 적이 있었어. 그 별이 내게서 떠날 바에는 차라리 죽기를 바랐지. 웃기지, 그 별이 사라지기를 가장 바라지 않았던 것도 나 자신인데 말이야.”
“별은 이미 죽었어.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맞아. ……어쩌면 난, 그 애가 죽을 리가 없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나 봐. 별이 영원할 것이라 믿은 옛 항해사들처럼…….”
소년은 상처가 많은 내 손을 꼭 쥐고, 담벼락을 따라 걷고 있었다. 담쟁이 사이에 장미 넝쿨, 담장 아래에 튤립과 수선화, 금목서와 코스모스, 하늘을 보며 피운 나리가 온갖 향기를 내뱉으며 코끝에 상쾌한 향기를 남긴다.
“……신이 되려고 한 적 없다는, 그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애가 만약 신이었다면 끝이 존재하는 별처럼 저 멀리서 반짝이지 않았을 것이다. 영원한 신성이 한순간에 끝나버리지도 않았겠지. 어쩌면 더 길게 존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는 다르게 흐르니까.
그러나, 그것을 아는가? 세상에 영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순수는 언젠가 종말을 고하고, 거짓과 진실은 시간 속에 시든다. 단지 그 시간에 잠시 닿아, 그때의 자신이 남긴 치장 없는 기록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이 영원히 남을 뿐이다. 수백만 년 떨어진 저 별에서도, 이 행성에서도 변하지 않을, 오롯이 하나뿐인 사실.
그 아이가 남긴 마지막 시는 그로서 불멸하는 것이다. 누군가 기억하는 한, 혹은 시간이 흘러 그것을 기억하는 이가 모두 소멸한다 하더라도.
실존하는 증거를 남기지 않아 잊혀지는 신보다도 더 오래도록 실존하며.
“폴.”
소년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다소 모호한 인상이, 이제야 뚜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A는, 소년은, 아르튀르 랭보는 웃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 틈에 있어. 터널의 안과, 터널의 밖의 사이.”
그동안 애썼다고 말하듯이.
“당신의 세상은 지금껏 어둠이었고, 눈은 이미 어둠에 적응했을 거야. 당신이 있는 곳이 당신의 끝이라고 생각했겠지. 초를 들 의지조차 상실해 그저 죽을 곳을 찾지 못해 걸어가고 있었잖아.”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듯이, 단호하게.
“당신은 몰랐지? 터널 바깥에 빛이 기다리고 있는 줄은.”
“……몰랐어. 터널 안에서 본 바깥은 어둠이었으니까.”
“그래. 나오지 않으면 몰라. 밤하늘의 별이, 내가, 저 너머에서 빛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빛이 언젠가는 당신의 어둠 속에서 길잡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랭보가 걸음을 멈춘다. 나 역시도 걸음을 멈추었다. 골목 너머에는 익숙한 문이 있다. 랭보는 모르는 문. 나 혼자만 알고 있는 문. 나의 좁고 낡은 집으로 돌아가는, 문.
“이제 당신 혼자 돌아가야 해. 여기서부턴 나도 모르는 길이거든.”
“……정말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익숙한 길이야.”
“그럼 더할 나위 없네. 완벽한 밤이 되겠어.”
“…….”
“폴. 당신의 걸음에 잠시 스쳐 갈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
소년은 마치 연극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처럼 멋들어진 인사를 한다. 지옥으로 가는 문을 열어주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 모습을 눈에 담는다. 아주 오래도록 눈에 담는다.
“우리의 운명이 비록 갈라졌지만,”
“당신과 내가 한없이 멀리 떨어진 덕에, 당신은 내 빛을 볼 수 있겠지. 당신에게로 달려오고 있을 빛을.”
그러니까 걸어가, 멈추지 말고. 나는 랭보를 크게 껴안았다. 휘청거리는 몸으로, 후들거리는 팔로. 등을 토닥이며 랭보가 머리칼을 쓰다듬는 감각이 느껴졌다. 어깨에 고개를 묻고 조금 울었던 것도 같다. 그의 어깨를 온통 적시는 동안에도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기다렸다.
“돌아가서, 어떻게 할 거야?”
“……할 일이 많아. 그동안 미뤄왔던 것들을 하나씩 해나가야 하거든. 그리고, 그게 다 정리되고 나면,”
“정리되고 나면?”
“네 무덤에 들를 거야.”
“그럼.”
“네게 한 문장을 바칠게.”
“당연히 그래야지.”
아쉬운 듯한 손이 떨어지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잘 가, 폴.”
눈을 떴을 때는 어느덧 아침이었다. 나는 서재 책장 앞에서 한껏 구겨진 채 잠에서 깨어났다. 목도 어깨도, 심지어는 무릎조차 마구 쑤셔 왔다. 고개를 들고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면 마룻바닥에 뺨이 눌린 자국이 만져졌다. 그리고 눈물이 말라붙은 자국.
몸을 일으켰다.
책장 앞에 있는 책상에 앉아 가볍게 펜을 쥐었다. 종이를 한 장 꺼내어, 우선 편지를 쓰기 시작하는 손에 망설임이 없었다.
마치 새것처럼 반짝거리는 구두에 빛이 반사되어 눈을 가볍게 찔러 왔다.
우리가 아주 먼 곳에서 헤어졌기에 나는 지금의 네 빛을 온전히 볼 수 있다.
언젠가 사라지고 말 이 빛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보려면 걸음을 멈출 시간이 없다.
울고, 웃고, 화내고, 가끔은 깊은 슬픔에 잠기더라도.
그리하여 네 사랑의 일부나마 닿을 수 있다면.
Dear, Ernest Delahaye.
자네와 내 사이에 아직 해야 할 말이 많은 것 같아서, 다시 펜을 들어 자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을 용서해 주길 바란다.
부디 이 편지가 자네의 평안을 해치지 않기를.
자네가 기차를 타고 떠나간 이후, 나는 집으로 돌아와 아주 긴 꿈을 꾸었어.
자네에게도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는 꿈.
불행히도 나는 당분간 아주 바쁠 예정이야. 정리하고, 수습해야 할 일들이 조금 많거든.
아마 자네도 그럴 테지. 세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일까.
그래도 이 일들이 조금 수습되고 나면,
그때는 나를 초대해 주겠어?
아주 긴 이야기를 나눌, 약간의 시간이 있을 때.
P. Verlaine.
- 다음글[랭폴] 자기 소멸의 궤적 (상) 26.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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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출연 @t6wI9Ba3UqSaAFO함께 해준 찬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엔딩 이후의 베를렌느에 대한 생각을 종종 해요. 특히 이번 글은 재범 베를렌느를 생각하고 쓴 글인데, 초록 Rep.이 봉합과 화해가 아닌, 중증 우울증 환자가 마이너스를 지나 비로소 출발점에 들어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거든요.
아래는 그걸 모티프로, 초기에 구상했던 메모입니다.
[아프리카에 다녀온 베를렌느의 낡은 구두 이야기/ 낡은 구두를 관리해주는 사람이 늘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음을/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나 누구 하나쯤은 이어져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까에 관한, 완결하듯 쓸 이야기]
원래는 구두닦이 소년이 정말 옆집 아이였고, 들라에의 세 아이들도 등장하고, 이웃과의 유대를 넓혀가며 그렇게 베를렌느가 일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익숙하지 않은 1인칭 시점으로 글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쓰다보니 깨달았습니다. ‘이거 너무 판타지 됐네? 아, 이건 이미 비가역적인 어떤 선을 넘어갔다. 원래 쓰려던 걸 쓰려면 다 갈아엎거나, 이대로 그냥 가야 한다.’ 그 시점이 마감 이틀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냥 늘 하던 국밥을 끓이게 되었습니다.
부디 아쉬운 대로나마 맛있게 드셨길 바랍니다.
제목은 박노해 시인의 시에서 인용했습니다.
글을 쓸 때 이 시를 생각하고 쓴 건 아닌데, 다 쓴 직후 검색하다가 운명처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시 전문도 정말 좋으니 꼭 읽어보세요.
…
오직 빛에 새긴 그 사랑만 남아,
사랑으로 자신을 사르지 않는 인생은
밤하늘에 총총한 저 별 하나
영원한 그리움으로 빛낼 수 없으니
자신을 다 불사른 자만이 그을 수 있는
아름다운 자기 소멸의 궤적이여
오늘 소리 없이 사라지는 별들이여
다시 찬연하게 살아오는 별빛이여
…
박노해, 별에 대한 가장 슬픈 말 中
앞서 말한 사연으로, 기회가 된다면 꼭 외전을 써보고 싶습니다. 감성 국밥집 사장의 알리오올리오 창업기를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지금도 잘 모르지만, 제 박자에 맞춰 가보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특별출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