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폴] 자기 소멸의 궤적 (상)

<span class="sv_member">특별출연</span>
특별출연 @t6wI9Ba3UqSaAFO
2026-04-09 14:25

찬님과 함께한 2026 랭보 · 스톤 트윈지 <날아가는 것, 남아 있는 것> 에 투고한 글입니다.

찬님의 스톤 글도 아래 포스타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URL

뮤지컬 랭보 CP 랭보x베를렌느(ㄹㅂ기반)

CP적 내용은 거의 없습니다만 떠난 이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꿈을 꿨다.

아주 긴 터널을 지나는 꿈이었다.

터널을 나오던 순간, 바깥까지 한 걸음을 남겨놓고 멈추어 섰다. 머리 위로 하얀 별들이 쏟아질 듯 반짝거리는 것을 눈에 담으며,

나는 눈을 떴다.

 

일어나셨어요?”

 

아직은 새벽빛이 채 가시지 않아 창밖이 희끄무레하다. 막 깨어난 머리가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돌아간다. 청년의 목소리는 건조하지만 날 서 있지는 않다. 천천히 일어나셔도 돼요. 아직 배 시간까지는 조금 남았어요. 이어지는 목소리에 주인을 짐작한다.

 

들라에.”

, 베를렌느 씨.”

 

몸을 조금 일으키면 대체 언제부터 돌아갈 준비를 마친 건지, 카우치에 기대어 무언갈 적고 있던 노트를 내린 상대방의 시선이 나에게 닿는다. 소년은, 아니, 청년은 지난밤보다 어쩐지 홀가분해 보인다.

 

내가 아주 오래 잔 줄 알았는데.”

그랬으면 베를렌느 씨를 때려서라도 깨웠을 거예요.”

 

성정에 맞지 않는 못된 말을 뱉어내는 것이 쉽지 않아 우물쭈물하며 옷 밑단을 잡던 머쓱한 손은 온데간데없이 뼈가 있는 듯, 유쾌한 듯한 말이 들려온다. 그는 이제 세 아이의 아빠다. 청년은 작게 미소 지으며 아프리카를 떠나는 배표 중 한 장을 내 쪽으로 밀어준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죠.”

 

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표를 가만히 챙기고 욕실로 향하면 거울이 몸을 그대로 비춘다. 형편없이 말라빠진 것이 한 겹 옷감 위로도 여실히 드러난다. 눈 밑은 보랏빛, 초록빛. 마치 움직이는 시체와 같다. 그나마 어제는 술기운에 잠들지 않았기에 누렇지는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래도, 퍽 형편없는 꼴이로군.’

 

제 모습을 잊을 정도로, 한동안 거울을 보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생소한 것을 바라보듯 거울에 손을 뻗으면 거울 속의 덥수룩한 머리를 가진 사내도 따라 손을 뻗는다. 뺨을 만지면 따라 푸석한 뺨에 손을 댄다. 겨우 몇 가닥 돋아난 수염이 손을 간질인다.

 

간단히 씻고, 셔츠를 다시 꿰어 입고, 단추를 채운다. 셔츠의 맨 윗 칸 단추가 여행이라도 간 양 어디론가 사라졌음을 깨닫는다. 발 안에서 모래가 까끌거려 구두를 들어 모래를 털어냈다. 구두는 광택이 났던 것이 언제인가 싶게 흙먼지투성이다. 아무리 구두를 털어도 모래가 아주 오래 따라다닐 것 같다는 것은 예감일까, 그저 망상일까. 돌아가면 할 일이 많겠다.

욕실을 나오면 그새 환기를 한 듯 열린 창문이 보인다. 미적지근한 적도의 바람을 맞아 펄럭이는 흰 커튼, 그 틈 사이에는 햇빛에 반짝이는 머리카락……

아니, 그럴 수 없다.

그 아이는 이제 없다. 그 아이가 나를, 내가 그 아이를…… 설령 사랑했었다고 한들, 이제는 의미 없는 일이다.

 

.

 

들라에가 창문을 닫는다.

 


 

우리는 말없이 왔던 길을 걸어 항구에 도착한다. 올 때보다 작은 배에 사람이 가득 탔다. 뱃고동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한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사이로 갈매기들이 떠나는 이를 배웅하는 마음을 대변하듯 바쁘게 날아다닌다. 배가 바다를 가르는 소리, 승객들의 웅성임.

갈매기를 한참 동안 구경하다 퍼뜩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육지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고, 배는 바다 한가운데를 나아가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난간을 붙들고 있었는지, 손에는 빨갛게 자국이 남았다.

객실은 좁고 사람이 많았다. 배가 파도에 흔들리면 옆 사람의 어깨에 제 어깨가 닿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으면 꼭 사람인 것처럼 함께 중얼거리던 것들이 무슨 일인지 조용했다. 그렇기에 현실의 소리가 더욱 잘 들렸다. 어린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 속이 좋지 않은 늙은 남자와 무엇이 즐거운지 떠들고 있는 아이들 틈에서 조용히 창 밖을 바라봤다.

 

배에서 내리면 또 기차를 타야 했다. 어떻게 이 먼 길을, 무슨 정신으로 왔던 건지. 들라에와 함께 여정을 떠나던 일은 아주 오래전 일처럼 희미하면서도, 또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억은 술에 취해 있던 기억뿐이었다.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앞서는 구둣발을 따라 걷기만 하던 기억. 덜컹거리는 기차에 앉아 술을 마시고, 난간을 쥔 채 또 마시고, 암전. 그리고 눈을 뜨면 또 마시던 기억들. 습관적으로 품을 뒤졌다. 짐을 챙기다 놓고 왔는지 품 안에는 묵직하게 찰랑거리던 무게 없이 가벼웠다. 어쩔 수 없지. 그런 생각을 했다.

 



기차를 타고 또 한참,

그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들라에는 이따금 노트에 무언가 써 내렸으며,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눈길을 주었으나 딱히 입을 열지는 않았다. 나도 뭔가 말을 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졸음이 찾아왔다.

병든 닭처럼 꾸벅거리며 졸다 보면 귀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 역이 파리이니, 내릴 사람들은 전부 내리라고. 화들짝 놀라 일어나 짐을 챙겼다. 들라에도 졸았는지 눈이 반쯤 감겨 있는 채로 제 가방을 건넸다가 허둥지둥 서로 가방을 다시 바꿨다.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웃어도 되나?

어떻게 웃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웃었다. 들라에도 머쓱하게 따라 웃었다. 우리는 잠시 동안 웃느라 하마터면 내리지 못할 뻔했다.

 

기차가 사람들을 뱉어놓고 떠나고, 나와 그가 마주 보고 섰다. 그는 환승할 기차표를 쥐고 있었다. 이곳에서 샤를르빌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돌아가면,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기다리고 있겠지. 모험 이야기를, 세상을 떠난 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 것이다. 아이들 앞에 선 그의 얼굴이 그려지지 않았다.

 

여기까지겠네요.”

들라에,”

.”

미안했어, 그동안.”

……모쪼록 잘 지내세요.”

 

그가 손을 내밀었다. 손을 마주 잡으니, 마디마다 굳은살이 느껴졌다. 조금은 투박한 따뜻함에 잠시 손을 쥐고 있다가 놓아주었다.

아프리카에서 꾸었던 꿈 이야기를 하려다가 이내 그만두고 그냥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 진심이었다. 마지막으로 눈을 맞추고,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사람들 사이에 천천히 끼어들어 역을 빠져나갔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아주 긴 터널에서 나왔고, 머리 위로 하얀 별들이 쏟아질 듯 반짝거렸다.

불행히도, 그것이 모든 것을 완전하게 봉합해 줄 해피 엔딩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면서 모든 것을 수습해야 했다.

아니면 그만두거나.

 


가방을 든 채로 집 문을 열었다. 우체통이 꽉 차 문틈에 꽂혀 있던 우편물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나를 찾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던가, 새삼스러워 헛웃음이 나왔다.

우편물을 하나하나 뜯었다. 몇 년 전의 고지서결국 집주인이 고지서를 보내다 지쳐 직접 찾아왔던 것 같다부터, 각종 협회의 편지며 안부 인사, 간간이 팬레터나, 글을 기고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짐을 풀 새도 없이 눈에 들어온 것들을 하나씩 분류했다. 나중에 누군가 보더라도 한 번에 버릴 수 있도록.

우편물을 분류해 놓고 나니 책상이 어지러운 것이 신경 쓰였다. 마시다 흘린 채 증발한 술 자국, 잉크가 엎질러졌는데 치우지도 않은 흔적, 종이 뭉치, 음식물이 떨어졌다가 쓸려나간 흔적, 온갖 생활 자국이 있는 책상이었다. 어차피 마지막일 거라면 깔끔하고 싶었다. 결국 여독을 풀지도 못하고 책상을 닦다가 초저녁에 지쳐 잠들었던 것 같다.

 

"…….“

 

다시 눈을 떠 보니 치우려던 책을 끌어안고 누워있었다. 어느새 한밤중이었다. 오래된 몸이어서인지, 찬 바닥에 누워 자서인지 허리가 결렸다. 그나마 일어설 수는 있어서 다행이었다. 책상을 짚고 일어서 몇 걸음 걸었는데, 한 곳에 모아두었던 술병에 발이 걸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손이 책상을 더듬으며 잉크가 확 엎질러졌다.

 

"……!“

 

눈물이 핑 돌 만큼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기껏 책상을 치웠던 것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다시 잉크 자국을 지우려면 시간이 걸릴 텐데. 병을 다른 곳에 모아놓거나, 뚜껑을 좀 잘 닫아 놓을걸. 항상 이런 식이었다. 제가 무언가 해보려고 한 일들은 전부 실패했다. 자신에 대한 짜증과 한심함이 더 참을 수 없이 울음으로 올라왔다.

엉엉 목 놓아 울며 손에 쥐이는 대로 아무거나 던지듯 내려놓고 나니 머리가 조금 맑아지며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얼굴이 붉어지는, 열이 오르는 감각이 참 낯설었다. 어쨌든 애써 정리했던 종이는 다시 어질러졌고, 맙소사. 난리를 치는 바람에 잉크가 책 몇 권에도 묻었다. 잉크를 대강 닦아내고, 결리는 허리를 천천히 굽혀 책들을 집어 들어 다시 책상에 올렸다.

 

책 옆에는 잠결에 벗어놓았던 낡은 구두가 있었다. , 당연하게도 잉크가 한바탕 묻어 있었다. 오래 신어 길이 잘 들은 구두였다. 이제는 제 발 가죽 정도로 느껴지는 구두. 어느 순간인가 광택을 잃었고, 주인 따라 잘 닦인 길 대신 흙먼지 길이나 구르게 된 비운의 구두. 이 구두도 막 만들어졌을 땐 상상이나 했을까, 포장된 길이나 마룻바닥 대신, 자신은 아프리카에 갈 운명이라는 것을. 모래에 채이고 돌을 밟으며 거칠어질 것을. , 나는 말이야. 그곳을 알기 전부터 내 자신이 아프리카에 가야 할 운명임을 알고 있었어. 어떻게 알았냐고? 그냥, 그냥 알고 있었어…….

짙은 가죽에는 뿌연 먼지가 쌓였고, 발목을 편안히 감싸는 천은 어두운색의 잉크를 흡수해 때가 탄 것보다 더 심한 얼룩이 생겼다. 그 구두를 내려다보며 나는 문득 구두를 닦아야겠단 생각을 했다.

 

이 앞 광장으로 나가면 누구든, 누구든 구두를 닦아 줄 사람이 있겠지. 그런데 이렇게 더럽고 낡은 구두를 닦는다고 다시 신을 수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이 잉크를 지울 수는 있나? 아무래도 어렵겠지. 그럼 버려야 하나. 맨발로 떠날 수는 없는데.

발 가죽 같은 구두를 버린다고 생각하니 갑작스레 서글퍼졌다. 쉽게 무언가에 이입하고 괜히 서글퍼지는 것도 나이가 들어서일까.

 

구두를 닦든, 버리든 아침이 되어서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우선은 잠이나 자자.

다시 잠들기 위해 카우치에 누우니 눈치 없이 몸이 배고프다는 신호를 보냈다. 긴장이 풀어진 이후로, 기차에서 무언갈 간단히 먹은 게 마지막이었던가. 차갑게 식어 있는 집 안에는 술 말고 먹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 신호를 무시하고 잠에 들었다.

 

꿈은 꾸지 않았다. 아니, 꾸었던 것 같기도 하다. 푸석거리는 갈색 머리칼이 뺨을 스치는 달콤한…….당신은 온종일 취해 있는 것이 어울려. 헤실대잖아, 바보같이.

 

끼익.

 

퍼뜩 잠에서 깬 것은 이 좁고 낡은 집에 어울리는, 아귀가 덜 맞아 삐걱거리는 경첩 소리를 듣고 나서였다.

바깥은 아직 한참 어두웠고, 실루엣이 푸른빛으로 떨어지는 새벽이었다.

그래도 꼴에 시인이랍시고 구색에 맞춰 서재로 쓰는 창고 방의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 사이로 빛이 새어 나왔다.

 

……내가 불을 끄지 않았던가?”

 

아니, 일단 집에 들어와서 서재 불을 켠 적이 있었나?

삐걱거리는 허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서재로 다가갔다. 불빛으로 가는 동안 긴장으로 목뒤의 털이 곤두설 법도 했으나, 누적된 피로와 왜인지 모를 느슨함이 긴장을 느긋하게 잡아 세웠다.

 

여름날의 햇빛보다도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빛이 먼지 쌓인 서재 전체를 부드럽게 밝히고 있었다. 빛은 책장의 틈에서 새어나 오고 있었다. 얼떨결에 그 틈을 잡으니, 기름칠이 잘 된 경첩이 돌아가는 특유의 감각이 있었고, 틈이 문처럼 열려 성인 남성이 지나갈 만한 자리를 내었다. 안에서는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아니, 바깥이라고 해야 할까. 서재에 이런 숨겨진 공간이 있었다고? 영문도 모른 채 걸음을 들여놓았다.

 

한 걸음 들이자마자 한여름의 태양이 갑자기 내리쬐는 듯했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태양. 아프리카에서 겪은 적 있는 무더움. 그러나 바람만은 코끝을 산뜻하게 스치고 지나가며 땀을 훔쳐 간다.

 

걸음을 옮기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골목이었다. 담쟁이가 담을 따라 자라고, 꼼꼼히 구석을 살펴본다면 살찐 고양이가 나른히 낮잠을 자고 있을 것만 같은 공간이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긴장조차 풀리려고 하던 때,

 

.”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면 웬 소년이 눈앞에 멀뚱히 서 있었다. 부스스한 갈색 머리칼과 태양을 담은 듯한 눈, ……아니,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아이는 누가 봐도 길가에 지나가는 구두닦이 소년처럼 생겼다.

 

아저씨.”

 

심지어는 내 이름을 부른 것도 아니었어? 나이가 들었나. 정말로 귀도 나빠진 것 같은데.

 

아저씨.”

듣고 있으니까 그만 불러…….”

사람이 부르는데 들은 체도 안 하잖아요.”

 

살아 있죠? 소년은 손을 제 눈앞에서 몇 번 흔들어 보인다. 제법 성가시다고 생각하면서 입가에 헛웃음이 지어진다.

 

죽지는 않았어.”

그럼 살아있는 것도 아닌 건가요?”

 

소년은 끈질기게 물어보았다. 난데없이 집에 있다가 웬 골목으로 들어와서는, 왜 이런 말장난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소년을 살펴보았다. 푸슬거리는 머리칼 위로 모자를 꾹 눌러쓴 모습은 그 애를 닮았다기보단 차라리 어린 시절의 들라에를 더 닮았다.

 

아니, 아무튼. 아저씨.”

왜 자꾸 부르니.”

아저씨 저쪽 집 살죠? 밤에 웬 남자가 소리 지르면서 울길래 나는 부부싸움인 줄 알았네.”

아니야……

에이, 어른도 울 수 있죠.”

 

소년은 어깨를 으쓱한다. 머쓱하다는 생각에 괜히 부정해 보지만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는 모습만 보일 뿐이다.

 

좋아요. 그럼 모르는 척해줄게요. 대신,”

대신?”

구두 좀 닦아요.”

구두?”

더러운데, 어디 시궁창이라도 다녀왔어요?”

소년의 말에 자연스럽게 시선을 내려 구두를 바라본다. 아까까지 분명 실내화를 신고 있지 않았던가? 잉크 묻어서 더러워졌고, 그래서…… 아니, 지금 보니까 신고 있는 것은 내가 늘 신고 다니던 그 구두다. 대체 언제부터?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의문을 가지려면 가질 것이 한두 가지도 아니고, 새삼스럽다.

 

시궁창이라니.”

아니면 울면서 시궁창에 발길질이라도 했나?”

아니라니까!”

 

눈높이가 얼추 맞을 정도로 큰 소년이 속을 살살 긁는 말을 하니, 정곡을 찔릴 것 같아 목소리가 커졌다. 아이가 눈썹을 으쓱한다.

 

혹시 돈 없어요?”

 

그 말에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조금 전까지 자다가 나온 사람 품에 돈이 있을 리가 없지. 다른 쪽 주머니도 괜히 뒤적여보곤 손을 빼냈다. 소년이 혀를 찬다.

 

시궁창에 발길질도 하는데, 거지기까지…….”

그런 거 아니야. 저기, 저기서 가져오면,”

 

분명 나올 때는 벽 사이에 틈이 빼꼼히 나 있었는데, 다시 돌아가려고 고개를 돌리니 틈이 없이 견고한 벽돌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러면 집에 어떻게 돌아가? 난감한 표정으로 다시 소년을 돌아보니 소년은 선심 쓰듯 말한다.

 

, 괜찮아요. 돈 없는 아저씨. 그럼, 대신에,”

대신에?”

나한테 한 문장만 줄래요?”

무슨 문장?”

, 구두 다 닦고 나서 생각나는 걸로.”

……난 이제 글은 안 써.”

에이, 돈도 안 받는데?”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아요. 서운하게. 소년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손을 뻗어 무언가를 건넨다. 얼떨결에 받아 보니 손안에 끈적한 동그란 것이 굴러다닌다. 사탕이다. 남이 주는 것을 잘 받아먹는 편은 아니지만, 무심코 입안에 사탕을 넣고 굴렸다.

 

, 여기 앉아봐요.”

 

이끄는 대로 나무 상자에 걸터앉아 사탕을 굴렸다. 너무 오랜만에 단것을 먹어서인지 혀가 찡한 느낌이 들었다. 혼자만 먹는 거야? 심술쟁이 어린아이처럼.

그러고 보면 그 애도 단 것을 참 좋아했었다. 또래답지 않은 성숙한 모습을 주로 보이다가도 어쩌다 단 것을 들고 오면 눈이 반짝이는 것이 영락없는 아이 같기도 해서, 그 모습을 꽤 좋아했었다.

그리고 나 또한 단 것을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아주 오랜만에 깨달았다.

 

그런데 너는 이름이 뭐니.”

A, 그냥 A라고만 불러요.”

 

A? 이름에서 따온 약자인지, 그냥 이름을 알려주기 싫은 건지 모르겠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소년이 반대로 묻는다. 이름이 뭐예요?

 

나도 그냥 P라고 불러.”

아저씨 삐졌어요?”

……아니거든.”

 

괜히 유치하게 틱틱대는 말을 듣고는 소년이 한참 웃는다. 낯부끄러워져 말을 돌려버렸다.

 

구두는 언제 닦을 거야?”

, 알았어요. 기다려 봐요. 먼저 먼지를 털어야 하거든요. 세상 모든 일엔 다 순서가 있다구요.”

 

층층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기 위해 브러쉬를 꺼내는 것을 보고 나서야 소년이 정말 구두닦이임을 알 수 있었다.

 

어우, 먼지. 정말 어디 다녀온 거예요?”

아프리카에 다녀왔어.”

, 아프리카? 엄청난 모험을 하고 왔나 봐요.”

그렇게 엄청나다고까진…….”

 

태양은 잔인할 정도로 내리쬐고, 걸음마다 모래가 발에 들어가는 곳이라면서요? 소년이 반짝이는 눈으로 말을 잇는다. 그렇게 멈출 줄 모르는 눈을 보고 있으면, 또 속절없이 과거의 기억으로 끌려가게 되어 버리는데. , 나는 언젠가 아프리카에 가게 될 거야. 이건 다짐이 아냐, 예언이지. 그때가 오면 당신도 떠나자, 나랑 같이. , ……

 


?”

 

퍼뜩 눈을 뜨면 촛불이 무언가를 태우는 듯한 냄새가 난다. , 머리카락 끝이 그슬렸다. 화들짝 놀라 촛불로부터 몸을 멀리한다.

 

피곤하면 자러 가지 그래. 머리카락이 탈 뻔했잖아. 병든 닭같이 꾸벅이느라.”

괜찮아, 이런 날도 있어야지…… 오늘은 월식이잖아.”

정말 괜찮겠어?”

그럼.”

 

하지만 촛불은 위험하니까 치워 두자. 촛대를 저 너머로 미는 것을 보며 랭보가 입꼬리를 올린다. 그러더니 열린 창 난간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본다.

 

벌써 시작하는 것 같은데.”

 

그의 움직임을 따라 난간 가까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창밖을 바라본다. 이 언덕에서 우리 집보다 높은 집은 없을 거야. 그게 마음에 들어. 랭보가 종종 하던 말이었다. 그 말대로, 한눈에 점점이 찍힌 불빛과, 그 너머 바다와 그보다 더 멀리 있는 달이 보인다. 둥글고 밝은 달 끝자락이 그림자에 먹혀들고 있었다.

랭보는 빤히 그 너머에 시선을 두다가, 대뜸 난간에 한쪽 발을 걸쳤다.

 

뭐 하는 거야, 랭보. 위험해.”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몸을 돌려 날렵하게 지붕 모서리를 잡았다. 양 손으로 잠시 몸을 들썩거리다가 지붕 위로 올라가는 동안, 혹시나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놀란 눈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던 것은 나뿐이었다.

 

지붕 바로 밑 집이라, 이런 게 좋네. 더 잘 보여. 더 가깝고.”

랭보, 정말 안 내려올 거야? 위험하다니까.”

, 당신도 이리 올라와 봐. 언제 다시 오겠어, 이런 날이.”

난 괜찮아, 랭보. 정말로……

그럼, 내가 뛰어내리면 잡아줄 거야?”

랭보!”

 

그 말에 알 수 없이 화가 났던 것 같다. 내심 품고 있던 불안감을 들켜서일까. 크게 이름을 부르며 지붕을 향해 손을 뻗었는데, 랭보는 어이쿠, 같은 소리를 하면서 내 둔한 몸짓을 가볍게 피해 갔다.

 

농담이야, 농담.”

농담이어도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나는 뚱한 표정으로 난간에 기대어 달을 바라보았다. 언덕 아래로 가로등이 점점이 보이며 밤을 잊고 놀던 사람들이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와 실랑이하던 동안, 달은 지구의 그림자에 거의 다 잡아먹히고 있었다. 랭보가 무어라 몇 마디를 떠들었지만, 나는 모른 척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 정말 별이 더 선명해졌어. 점점 더 그림처럼 빛나고 있잖아.”

…….”

, 정말 아무 말 안 할 거야?”

…….”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 뭐가 마지막인데.”

 

여전히 화가 나 있었지만, 마지막이란 말엔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들리고, 내 머리 옆으로 구두 한 쌍이 나란히 내려와 발을 흔든다. 당연하게도 머리를 부딪히지는 않았다.

 

저 별 말이야.”

별이?”

이미 죽은 별일지도 모른대.”

나는 침묵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별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예컨대 수백만 년 전에 끝장난 저 너머에 있는 별이, 빛만은 남아서 여전히 우리에게 달려오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지. 깜빡, 깜빡…… 하고.”

……만약 정말 끝난 별이라고 해도, 끝이 다가올 때까지 우리는 알 수 없겠네.”

맞아. 어쩌면 내가 죽을 때까지도, 아니…… 새로운 천 년이 시작될 때까지도 그 끝장난 빛은 여전히 달려오고 있을 수도 있고. 너무 먼 곳에 있어서 그 빛이 영원할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 하지만 별조차 영원하지 않아. 옛 항해사들은 별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어서 별자리와 이야기를 만들고, 지도를 만들었지만 그렇지 않다면.”

…….”

그럼, 대체 무엇이 영원한 걸까?”

 

달은 어느새 전부 가려졌다. 요요히 붉은빛을 내는 달을 바라보며 랭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인세의 불빛이 하나씩 꺼져가는 밤에, 별들은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 어쩌면 말이야.”

?”

만약, 인간이 별처럼 빛을 내는 존재라고 가정한다면.”

…….”

그렇다면 저 너머, 인간이 저 먼 우주로 떠나 언젠가 소리 없이 죽어버리더라도 지구에선 여전히 그 빛을 볼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 애가 영원히 빛날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던 것 같다. 마치 별자리가 영원할 것이라 믿은 옛사람들처럼.

 



눈을 뜨면 목이 뻐근한 것을 느꼈다. 허리에 이어 이제는 목까지,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몸이 성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긴 하지만 어쩐지 조금 억울하기는 했다. 예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시선을 내리니 소년이 자신을 빤히 보고 있다.

 

, 잠들었었어?”

아주 잘 자던데요? 침까지 흘리고.”

 

황급히 입가를 닦았으나 묻어나오는 것은 없었다.

 

거짓말인데. 그걸 속아요?”

어른을 놀리는 그런 못된 버르장머리는 어디서 배웠어?”

, 또 버르장머리라고 할 것까지야.”

 

소년은 어깨를 으쓱했다. 뻔뻔한 고양이 같은 태도에 무어라 더 하려던 마음도 사그라들었다.

 

먼지는 다 털었어?”

먼지가 어찌나 많던지, 저쪽에 모래 무덤이 하나 생겼을 거예요. , 그것보다 저거 봐요.”

저게 뭔데?”

 

소년이 손을 따라 가리킨 곳을 따라가면 태양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맨눈으로 보기엔 과하게 눈 부신 빛이 눈으로 들어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지만 아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것을 쳐다보았다.

 

일식이네요. 곧 어두워지겠어요. 그 전에 끝내야 하는데.”

끝낸다고?”

나도 집에 돌아가야죠!”

, , 그렇지.”

 

너 그런데 집은 있고? 라고 말할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소년이 천을 꺼내 들어 눌어붙은 먼지를 문질러 닦아냈다. 세정제 같은 거라도 묻어 있는 건지 한번 문지를 때마다 씻기지 않을 것 같던 얼룩이 조금씩 지워져 갔다.

 

잉크는 어쩌다 묻힌 거예요? , 잉크만 묻은 게 아니네. 이건 뭐예요?”

 

소년이 손으로 짚은 얼룩 자국을 보고 있으니 민망함이 몰려와 얼굴이 확 붉어졌고, 헛기침을 한참 했다. 오래 신어서 그래. 목 바깥으로 나오는 말이 어색하게 들렸다.

 

, 그렇게 말하니까 오래 신은 것 치고는 꽤 깔끔하긴 하네요. 잉크 자국 빼곤. 밖에 잘 안 나갔어요?”

자꾸 그렇게 툭툭 던질 거니?”

아차.”

 

말로는 아차, 라고 하면서 눈치를 보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 것이 거슬리기는 했다…….

 

그래도 내가 닦은 구두는 다를 거예요.”

뭐가 다른데?”

오래 반짝이거든요. 아저씨가 걷는 동안, 내내. 맘만 먹으면 골목 너머에서부터 존재를 알 수 있을 정도로.”

걷는 내내?”

당신이 걸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야.”


자기 소멸의 궤적 (하)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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