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폴] Narratage sequence(상)
뮤지컬 랭보 CP 랭보x베를렌느(ㅇㅊ기반)
17세와 37세의 랭보가 긴 꿈에서 과거와 현실, 미래를 유영합니다.
2025 랭보 앤솔로지 [우리는 사랑의 계절에 있고] 에 투고한 글입니다.
앤솔로지 온라인 게시 컬렉션 링크: URL (컬렉션 업데이트 예정)
R-19 씬이 깁니다(...) 수위를 원치 않으시는 분은 열람에 재고 부탁드립니다.
“굳이 나를 보러 와준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기는 뭣하긴 하지만, 들라에, 너라면 내가 하는 말을 어떤 판단도 없이 들어주겠지. 의사 선생에게도 말했어. 난 빠른 시일 내로 진통제 투여를 그만둘 거야.”
“이런, 소리는 지르지 마. 나 정말로 괜찮으니까. 그래, 일단 진정을 하고… 들라에, 너는 지금 환자를 보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어. 병마와 싸우다 못해 무릎을 저번 주에 절단한 환자에게 하는 말이라면, 확실히 그게 합당해. 약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겠지.”
“하지만 에른, 너의 랭브에게 해야 하는 말은 그게 아니야. 너는 봤잖아. 내가 샤를빌을 떠나 어떤 모험을 했는지, 또 어떻게 돌아왔는지. 그러니까 내 말을 잠시 들어주었으면 하는데.”
“…고마워.”
“괜한 고집을 부려서 너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은 건 아니야. 만용이나 객기는 더더욱 아니고. 난 내 정신이 흐려지고 있음을 충분히 느끼고 있어. 내 육체는 동지로 나아가는 겨울날 아침 해처럼 깨어있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잠에 든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어. 다른 점이 있다면, 태양은 동지 이후로 반환점을 맞아 다시 길어지겠지만 내겐 더는 그럴 시간이 없다는 거지. 그렇게 죽음이 올 거야. 맞아, 난 곧 죽게 될 거야. 그렇다면 그 전에, 살아있는 시간을 충분하게 느끼고 싶어.”
“나 요즘 부쩍 런던에 있을 적의 꿈을 꿔. 약 기운에 취해 늘어졌다 고개를 들어보면… 그래, 그 시절의 그가 나를 걱정스레 들여다보는 꿈. 창밖으론 바다가 보이고, 두 다리는 튼튼하며, 유리잔에 비친 내 뺨은 생기로 가득하지. 그에게선 어제 마신 술 냄새가 나고, 며칠 제대로 못 잔 사람처럼 눈 밑이 거뭇하고 피부는 까슬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그에게서도 아직 앳된 티가 나던 시절이야.”
“나는 멀쩡한 다리로 벌떡 일어서서, 그를 끌어안아. 역시 무슨 꿈이라도 꾼 거지, 랭보.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면 이제는 없는 무릎 아래의 통증과 함께 현실로 돌아와.”
“가짜 종아리의 통증을 느끼는 것보다 더 끔찍한 건 약에 취해 잠든 동안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 거야. 인생이 한 편의 연극이라고, 어떤 유명하신 극작가 양반께서 그랬었지. 내가 잠에 든 시간은 연극의 한 장 전체를 할애해서 암전으로 보내는 것과 같아. 관객은 일어서서 이렇게 외칠지도 몰라. 에라이, 빌어먹을. 이게 무슨 웃기지도 않은 연극이냐! 그 장면을 수행하는 나는 어떻고.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 완벽한 검은 평안, 이게 죽음이랑 다를 게 뭔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부탁이야, 네가 이자벨 설득을 좀 도와줄래. 그 애는 분명 받아들이기 힘들어할 테지.”
“…하하, 울라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네게 아직도 어린 시절의 모습이 남아 있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군! 내가 고집을 부릴 때면 어린 너는 늘 그런 표정을 지었지.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 들라에, 그런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눈을 감으면 존재하지 않는 옛 시절의 꿈을 꾸고, 눈을 뜨면 이제는 없는 다리의 통증이 나를 괴롭히는데….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아, 간호사 선생이 놔주었던 진통제의 효과가 이제 도는 것 같네. 무릎 아래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아. 이상하지, 손 뻗어서 만져보지 않아도 이제는 없는데, 내게 그대로 붙어 있는 것 같다니까.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말이야.”
“내가 아프리카에 있었을 때 이야기를 해주었지? 그 모든 여정, 길, 발걸음. 길과 길이 아닌 곳이 구분되지 않는 황무지도 있었고, 마르세유 만큼이나 번듯하게 길이 닦인 도시도 있었지. 내가 마지막까지 머물던 곳은 작은 어촌이었어. 코앞에서 파도가 넘실거리고, 세븐시스터즈에는 비할 바 없지만 깎아내린 듯한 절벽이 있고, 아이들은 우르르 그물을 넘어 다니며 공놀이를 하는 작은 마을. …….”
…….
“…아, 잠깐 졸았군. 아무래도 눈이 계속 감기네, 죽을 날이 오늘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들라에. 난 조금…… 쉬어야겠어. 모처럼 시간을 내주었는데 기껏 보이는 모습이 잠에 빠진 모습이라니 미안하지만…”
명료하던 정신은 조금씩 흐려지고, 눈을 내리감으면 이내 조명이 꺼진다. 의식은 끝없이 바닥으로, 또 바닥으로, 병실을 벗어나 더 깊은 곳으로 곤두박질친다. 귓가에는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오다가 안개가 끼듯 점점 흐려져 사라진다.
“아,”
깜빡, 눈을 뜨면 친구가 보인다. 집에서 만든 뱅쇼는 마셔보았어도 이런 펍에 오는 것은 영 어색하고 이상스런 티가 나는, 어리고 어린 친구, 풋내기 소년 들라에. 풀물이 들어 약간 얼룩덜룩해진 자켓 밑단을 연신 쥐었다 펴가며, 종업원에게 손을 드는 것까지 얼떨떨한. 랭보는 픽 웃으며 매대에 가 맥주 두 잔을 주문한다.
“폴은 오늘 바쁘다고 하니까 우리끼리 마시고 들어가자. 오랜만에 본 친구랑 좋은 시간 보내라고 돈을 조금 쥐여주더라고.”
“랭보, 그… 우리끼리 이런 데 와도 되는 거야? 여긴 술집이잖아.”
“괜찮아, 이 펍의 주인장은 나이 같은 건 신경 안 써. 돈만 있으면 모두가 손님이거든! 덕분에 다른 술집에서 쫓겨난 주정뱅이 놈들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걱정하지 말라니까. 설마 이 구석진 곳에 단속이라도 나오겠어?”
조금의 시간을 두고 깨끗하게 닦은 잔에 맥주가 담겨 나왔다. 들라에는 그것을 아주 유심히 들여다봤다. 기포가 올라오는, 밀밭의 색을 담은 묵직한 유리잔 안에 담긴 맥주는 무척이나 청량하고 상쾌해 보였다. 자, 건배! 경쾌하게 들려오는 제 친구의 말에 엉겁결에 그가 잔을 같이 들고 부딪혔다. 잔 안에 담긴 액체가 흔들리며 꼭 파도 포말처럼 기포를 끊임없이 올려보냈다. 한 모금 입에 담으면 보리 특유의 큼큼함과 시큼한 듯 알싸한 탄산이 목을 온통 저릿하게 만들어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으으, 이런 걸 왜 마시는 거야. 시큼해.”
“하하하! 들라에, 아직 넌 영락없는 어린애야!”
들라에는 이후 질린 얼굴로 맥주 대신 물을 마셨고, 랭보는 들라에의 맥주까지 다 비우고도 술을 두 잔 더 시켰다. 갓 튀겨 따끈하고 기름 맛이 강하게 나는 피시 앤 칩스와 함께하니 기분 좋게 마실 수 있을 정도였다.
술 대신 들라에는 펍의 풍경을 종이에 가볍게 담았다. 호두나무 원목을 그대로 활용해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바 테이블과 종업원 뒤에 보기 좋게 진열된 술병들, 웃고 떠드는 사람들, 어쩐지 이 풍경에 잘 어우러져 샤를빌에 있던 몇 달 전보다 훨씬 어른스럽게 느껴지는 친구의 모습까지.
“랭보, 넌…”
“응?”
“어쩐지 좀 어른 같아.”
랭보가 어깨를 으쓱였다. 키도 조금 더 컸는데, 어때? 들라에가 눈썹을 으쓱이며 눈높이를 재는 듯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랭보는 그저 웃었다.
감자튀김이 몇 조각 남지 않은 바구니를 옆으로 밀어 치우려던 들라에가 뒤에서 날아온 나무 그릇에 등을 맞았다. 아야!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니 취객이 술잔을 치우다 손이 미끄러진 모양이었다. 사과도 없이 에이 씨, 하고 욕설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리는 취객을 보고 랭보가 표정을 굳히더니 일어나 그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이봐.”
“뭐야? 끅, 할 말 있어?”
“사람을 쳤으면 사과를 해야지. 영국 놈들은 엄마 치마폭에서 그런 것도 안 배우고 나오나?”
“씨, 어린놈이 왜 갑자기 시비야?”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들라에가 랭보의 손을 떼어내며 쩔쩔맸다.
“난 괜찮으니까, 그만 해, 랭보.”
“놔 봐, 들라에.”
“랭보? 아, 너 그 시인이랑 살림 차렸다는 어린 놈이구나?”
남자가 낄낄 웃었고, 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들라에가 악의 어린 시선에 어깨를 움츠렸다. 시인 놈은 어디 가고 다른 놈이랑 술집에 있지? 조롱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 시인 놈은 이미 돈 긁을 대로 긁고, 단물이 다 빠져서 버렸나 보지!”
“하긴, 다 늙은 남자는 좀 그렇지. 안타깝게 됐어.”
“소문에는 그 남자가 먼저 대달라고 요구했다던데?”
빌어먹을 호모 새끼들. 비웃음을 남기고 제 무리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남자의 어깨를 붙잡아 랭보가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우당탕, 의자가 뒤로 넘어지고 남자가 뺨을 잡으며 끄으으 앓는 소리를 흘렸다.
“이 미친 새끼가!”
“미친 새끼니까 주먹질을 하지.”
“그만 해, 랭보!”
취객 무리 중 한 명이 일어나 남자가 다시 달려들려는 것을 말렸다. 들라에 역시도 랭보의 몸을 거의 온 몸으로 가로막았다. 잔이 깨지는 소리에 놀란 종업원이 쟁반을 든 채 달려왔고 금방 싸움이랄 것도 없는 소란이 사그라들었다. 다 마신 맥주잔을 내려놓고 랭보가 주먹을 쥔 채 씩씩거렸다. 들라에가 랭보의 팔을 끌었다.
“나가자, 가자. 너 많이 마셨어. 죄송합니다.”
“입 조심해! 다시 마주치면 이 정도로 안 끝나니까.”
가자고! 들라에가 랭보를 꾸욱 밀치며 겨우 펍 바깥으로 끌어냈다. 바깥 공기는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웠고, 랭보가 나지막하게 욕설을 뱉더니 골목 쪽으로 들어가 주머니에서 파이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추위에 몸을 가볍게 떨던 들라에가 그제서야 자신과 랭보의 자켓, 그리고 가방을 모조리 테이블 옆에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머리 좀 식히고 있어. 짐 가져올 테니까.”
“알았어.”
“랭보, 진짜 가만히 있어야 해. 알겠지?”
“알겠다니까, 들라에.”
여전히 툴툴거리며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지만 랭보가 고분고분 들라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른 같아 보인다는 거 다 취소야. 들라에가 여전히 골이 잔뜩 나 있는 친구의 얼굴을 빠안히 응시하다 골목을 나서 펍으로 향했다.
“…….”
혼자 남은 골목에서 괜히 부아가 치밀었는지 랭보가 굴러다니는 병뚜껑을 발로 세게 찼다. 진정한 시가 뭔지도 모를, 글자 나부랭이나 겨우 떼었을 놈들이 제 친구와 자신을 모욕했을 뿐 아니라 그에게까지 더러운 말들을 쏟아낸 것에 화가 났다.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 몇 대 더 갈겨주고 싶었고, 실제로 그럴 수도 있었으나 랭보는 그저 파이프를 주머니에 넣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질 거라는 생각은 안 들지만 폴이 걱정할 테니까. 몇 번이고 싸우고 다니지 말라고 당부했었고… 그래도 이젠 애가 아니라고 해야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랭보가 피식 웃었다.
퍽,
병이 깨져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의 동시에 머리에 둔탁한 충격이 일었고 미지근한 액체가 머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랭보가 비틀거렸다. 퍼억, 쉽게 쓰러지지 않으니 한 번 더 머리를 강하게 가격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흔들리는 시야로 뒤를 돌아보려 애쓰던 랭보가 앞으로 풀썩 엎어졌다.
뭐야, 죽은 건가? 야, 죽을 정도로 때리면 어떡해! 걸걸한 목소리가 터널 너머에서 메아리치는 것처럼 웅웅 울렸다. 충격이 있었던 곳이 뜨겁다고 느껴져 랭보가 떨리는 손으로 제 머리를 만지려 했다. 붉은 액체가 흘러 시야가 가려졌고, 미친 듯이 졸음이 쏟아졌다. 잠들면 안 되는데, 여기서는…….
급격히 몰려드는 수마에 저항할 수 없이 의식이 끊어졌다.
“…아, 들라에. 내가 얼마나 잤지? 아직 창밖에 해가 환하게 떠 있는데.”
“두 시간 정도… 그래. 잠깐 깼나 봐. 요즘은 밤에도 종종 깨는 경우가 있거든. 밤에는 커튼을 완전히 쳐서 바깥이 잘 보이지는 않는데, 커튼 새로 달빛이 새어 들어올 때가 있어.”
“다시 잠이 올 때까지 그 달빛을 보곤 했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도, 풀벌레가 우는 소리도 더 가까이 들려와서 기분이 나쁘진 않더군. 그나저나, 여태 여기 있던 거야? 잠시 들른 줄 알았더니.”
“그래. 쉬는 날이라서… 좋네. 벌써 날짜가 그렇게 되었나. 날짜 감각이 조금 이상해졌어. 하루를 꼬박 잤다고 생각했는데 두 시간이 지나있거나, 까무룩 잠이 들었는 줄 알았는데 사흘을 내도록 잤다고도 하고. 책을 읽고 있었구나. 잠만 자는 친구 옆에서 읽는 책이 잘 넘어가는지는 모르겠는데 말이야. 무슨 책을 읽고 있었어? 문집인가? …음, 요즘은 눈앞이 종종 흐려서 말이야. 전시 도록이라. 주말에 파리 나들이라도 다녀왔어?”
“요즘은 파리가 아주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던데. 박람회를 개최했다고, 그래서 무슨 괴상한 철조 구조물을 세웠다지? 그래, 에펠 탑. 누군가는 뼈만 앙상한 철골 피라미드라고 부르던데. 네가 보기에도 그랬어? 하하하. 난 한창 짓고 있다는 소식만 들었지, 실물을 보진 못했거든. 따로 갈 일도 마땅히 없었고.”
“맞아. 파리에는 며칠도 못 있겠어. 예술가를 찍어내는 학교에서는 그럴듯한 예술가로 보이기 위한 방법을 가르치고, 잘 차려입고 뒷짐을 진 놈들이 서로의 쓸모를 재어보면서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가잖아. 물론 이 초라한 몸뚱이에, 헤지고 보풀이 일어난 옷을 입은 노동자는 끼워주지도 않을 테지만 말이야.”
“전시회를 다녀왔다고 하니, 오랜만에 내 친구가 그린 그림도 보고 싶은걸.”
“…그래? 그건 퍽 쓸쓸한 일이군. 난 네 그림을 꽤 좋아했거든.”
“들라에. 아무래도 난 조금 더 자야 할 것 같아. 응, 눈이 점점… 감기고 있잖아. 밤의 여신이 검은 날개를 병자 위로 드리우고 있다는 뜻이지…”
“그럼 지금 인사를 하지. 그래…….”
“안 일어나.”
폴 베를렌느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토해내듯 말했다. 그의 너머에는 얇은 이불을 덮고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는 앳된 얼굴의 소년이 있다. 에르네스트 들라에는 방금 막 저녁거리를 사 돌아온 참이었고, 무슨 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베를렌느가 횡설수설 말을 이어갔다.
“오늘 의사가 다시 다녀갔어, 크게, 크게 다친 건 아니랬잖아. 어디 부러진 것도 아니고 그냥 피부가 찢어져서 피가 난 거라고, 금방 일어날 거라고 했는데, 그게 일주일 전이었는데… 이제는 왜 안 일어나는지 본인도 모르겠다는 거야.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대.”
“베를렌느 씨…….”
“꼭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표정이면서…….”
베를렌느는 눈물이 말라붙어 엉망이 된 표정으로 들라에를 올려다봤다.
들라에가 쓰러진 랭보를 간신히 부축하여 집으로 돌아온 그날 베를렌느는 소리도 지르지 않고, 그저 끔찍한 상상이나 지독한 악몽이 현실로 나타난 듯한 표정을 짓고 랭보를 침대에 눕혔다. 들라에는 그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못 본 척하고, 그의 지시에 따라 의사를 불렀다.
그래도 랭보 또래의 아이와 함께니 감정 표현을 조금은 자제하려는 모습이었으나 들라에는 그가 몰래 우는 모습을 일주일간 서너 번은 목격했다. 아니면 이미 울고 나서 눈 밑이 퀭해진 모습을 보았거나. 그가 마른세수를 했다.
“…갑작스럽게 미안해. 사 오느라 고생했어, 들라에. 좀 쉬어.”
“랭보는 제가 잠시 보고 있을게요. 식사 좀 하세요.”
베를렌느는 고개를 저었다. 베를렌느 씨. 들라에가 재차 이름을 불렀고, 그는 그제야 겨우 작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깨가 둥글게 처져 초라하게 보이는 남자를 부엌으로 보내고 들라에는 그 의자에 다시 앉았다. 잠들어 있는 친구를 내려다보며, 여상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랭보.”
“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너는 깨어있을 때도 늘 꿈을 꾸는 것 같았지만, 정말로 재미있는 꿈을 꾸고 나면 네 모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잖아. 지금은 대체 어디서 헤매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대답이 없는 자신의 친구를 내려다봤다. 뺨에는 혈색이 도는 채로, 정말 자는 것처럼 고르게 숨을 내뱉는다. 그러나 아무리 바라봐도 눈을 뜰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의미 없는 후회와 불안이 무력하게 들라에를 덮쳤다. 그날 펍에서 조금만 더 일찍 나왔더라면, 아니… 그냥 같이 들어가자고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랭보는 자주 싸움을 하고 다니는 문제아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모욕을 들었을 때 가만히 있는 타입 또한 아니었다. 들라에는 제 친구가 그들에게 화가 난 이유를 이해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폭력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른스럽다고 했던 거 취소야. 투덜거린 다음 펍으로 돌아가 가방과 자켓을 챙기고, 잔을 치우고 있는 종업원에게 가 깨진 잔 값까지 물어내고 나니 시간이 꽤 흘러갔다.
“그 고요함을 조금 더 의심스럽게 생각해볼걸 그랬지.”
다시 펍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고양이가 토톳 뛰어가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골목이 고요했다. 랭보는, 이번에야말로 약속을 지키고 정말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걸까? 반성하고 있다면 베를렌느 씨에게 딱히 말하지 않아도 괜찮겠지. 랭보가 기다리고 있을 골목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아까 랭보에게 한 대 얻어맞았던 남자가 튀어나와 들라에와 전력으로 부딪혔고, 랭보의 자켓 역시 뒤따라오는 남자들의 더러운 신발에 짓밟혔다.
아, 진짜. 남자들이 사라진 곳을 보다 투덜거리며 자켓을 집어 든 들라에가 놀란 숨을 내뱉었다. 고개를 들면, 그곳에는 하얗게 질린 누군가의 손이 있었다. 손, 손목과 셔츠, 흘러나온 피로 범벅이 된 셔츠와… 많은 양의 피를 흘리며 엎어진 그의 친구가 있었다.
“조금 더 빨리 나올걸.”
…랭보! 현실 감각이 뒤집히는 듯한 기분과 현기증을 이겨내고 들라에가 쓰러진 랭보에게 달려가 어깨를 붙잡고 몸을 뒤집었다. 덜렁 힘 없이 움직여지는 모습이 꼭 죽은 사람 같아 공포심에 이성을 놓을 뻔했으나 미약한 숨소리와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박동이 느껴져 겨우 정신을 잡았다. 머리에서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리면 죽지 않나? 공포에 질린 생각이 연달아 들었고, 들라에가 그나마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어른은 런던에 단 한 명뿐이었다.
“…베를렌느 씨, 는 저러다 곧 쓰러질지도 몰라. 잠도 제대로 안 자고, 밥도 제대로 안 먹잖아. 랭보 네가, 자기 눈에서 사라지면 본인이 죽을 것처럼 군다니까.”
의사가 금방 깨어날 거라고 진단했던 것은 자신도 옆에서 들었다. 깨어나는 것만 보고 가겠다고, 집에 돌아가는 일정을 며칠 미루기까지 했으나 랭보는 깨어날 기색이 없었다. 숲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더라도 햇살이 눈을 덮어 간지럽히면 랭보는 금세 반짝이는 눈을 떴고, 눈을 감았던 동안 자신이 꿨던 꿈 이야기를 해주곤 했는데.
“그러니까 랭보, 얼른 일어나.”
베를렌느가 말한 것처럼 정말로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표정이었다. 억지로 깨운다면 대체 왜 깨웠느냐고 불평할 것만 같았다. 온기가 떨어지지 않는 손을 쥔 채 들라에가 가만히 쓰다듬었다.
“우리 어릴 때 기억나? 내가 형제들에게 옮아 지독한 감기를 앓았던 때. 난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거의 죽을 뻔 했다지. 그때 넌… 기껏 우리 엄마를 졸라 병문안을 와놓고 열이 올라 비몽사몽 한 내 손을 잡고 쓸모라곤 하나도 없는 말을 했었어.”
“책을 쌓아놓은 비밀 공간에 새끼 여우가 자리를 잡았으니, 어서 여우 사냥을 가자고 한다던가, 가을인데 학교 앞 개울이 꽁꽁 얼어버렸다던가.“
무슨 정신으로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누가 들어도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들이었다. 샤를빌의 숲에는 여우가 살지 않고, 그러니 당연히 여우 사냥을 갈 수도 없고, 한창 곡식이 노랗게 익은 날 좋은 가을날에 학교 앞 개울이 얼어버릴 정도로 추울 리 만무하다.
“그때는 몰랐는데, 그건 내가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한 말이었구나.”
제대로 들을 수 없는 상대방을 위한 말이 아닌, 자기 자신의 위안을 위한 말. 따뜻한 손을 잡고 차분히 말하는 것 만으로도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진정이 된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창밖으로 해가 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들라에는 생각에 잠겼다.
햇살이 눈꺼풀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기분에 눈을 떴다. 고개를 들어보면 제가 기대어 자고 있던 나무를 경계선 삼아 두 발 앞부터는 연두빛 들판이 펼쳐져 있고, 반대편은 짙은 색의 숲이었다. 들판을 따라 조금만 걷다 보면 한가로운 목동이 소를 방목시켜 놓고 낮잠을 자고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공간이었다.
“내가 숲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던가?”
그러나 런던에서는 이렇게 맨발로 평화롭게 낮잠을 잘 공간을 찾았던 적이 없었고, 울창하다 못해 어두움을 품고 있는 숲 안쪽은 햇빛을 투과해 따스하고 고요한 그의 고향 숲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렇다면 이건 꿈인가.
맨발에 밟히는 부드러운 풀의 감촉과 푹신하게 발가락을 감싸는 이끼 따위는 확실하게 느껴지는데 자기 자신이 살아있다는 실감이 들지는 않는 이상한 공간이었다. 나뭇잎 너머에 있는 태양이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기색이 전혀 없었고, 바람 또한 어느 방향에서도 불어오지 않았다.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들판은 이따금씩 부드럽게 물결치듯 흔들렸다.
랭보는 들판 쪽을 바라보았고, 다음으로 다시 숲을 바라보았다. 숲은 어둡고, 또한 아늑해 보였다. 태어나 요람에 놓일 때부터 본능적인 영역에서 추구하게 되는 편안함이 그곳에 담겨 있는 듯했다. 아주, 아주 어둡고 깊으나 두려움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들판은 그저 계속해서 넘실거렸다. 풀들이 실체 없는 바람에 따라 누웠다가 일어날 때마다 파도 소리처럼 솨아아 흩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몸을 돌려 들판으로 가는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늘진 곳을 벗어나 풀을 밟으며 몇 걸음을 걷다 보면 상쾌한 바람이 랭보의 얼굴을 가만히 쓸어내었다. 머리카락을 흐트러 놓고, 밟히고 채인 풀을 다시 세우며 지나갔다. 다시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여린 미풍이 산들바람이 되고, 된바람이 거세게 불며 온 몸을 저항하듯 밀어냈다. 풀잎이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거센 바람에 밀려 주춤이면서도 랭보는 계속해서 앞으로 걸었다. 발을 새로 딛을 때마다 하늘의 색이 뒤죽박죽으로 바뀌었다. 노을이 졌다가, 새벽이었다가, 녹빛이었다가, 다시 어둠이 오고… 돌풍이라 불러도 될 듯한 바람이 격렬히 몸을 부딪히며 스치고, 또 부딪히다 보면 누군가의 어깨가 랭보를 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이제 바람이 아니었다. 기차역을 빠져나오는 인파였다. 사람의 물결이었고, 하나가 된 군중이었다. 누군가 기차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만이 목적인 것처럼 랭보를 맹렬히 밀어냈다. 어깨를 부딪히고, 채이고, 밀리면서 랭보는 계속해서 앞으로 걸었다. 어느 순간 기세에 밀렸는지, 아니면 포기했는지 인파의 끝이 보였다. 거친 바람에 맥없이 나부끼던 리본이 제 자리를 찾았다.
사람이 한바탕 지나간 기차역 너머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한 신사가 있었다. 평소에는 본인이 어른인 척은 다 하면서, 결국 집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뛰어나가 위대한 시인을 실은 기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던 신사. 석조 건물이 멋들어지게 들어선 역에 딱 맞는 옷을 입어 이방인의 어색함이 전혀 없는 남자.
“폴!”
걸음을 멈춘 랭보가 힘차게 손을 흔들며 그를 불렀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설렘이 섞인 얼굴로, 입꼬리를 타고 푸슬푸슬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억누르며 기차역의 시계탑을 확인할 뿐이었다. 기차가 들어올 때가 되자 그는 누가 아르튀르 랭보인지도 모르면서 서둘러 플랫폼으로 나가 섰다. 또 다시 사람이 한바탕 빠져나가고, 그만큼 많은 사람이 타며 몸이 이리저리 밀리는데도 신사다운 기품을 잃지는 않았다. 부딪혀서 미안합니다, 덧붙이기까지 했다.
폴 베를렌느가 한참 위대한 시인을 찾으려 애쓰다 돌아본 그 너머에 한 소년이 있었다. 햇빛에 머리가 바래 금빛이 도는 가슬가슬한 머리칼에, 유래없이 화창한 날 굳이 챙겨 입은 푸른 자켓 탓에 뺨에 홍조가 도는, 풀 냄새와 알싸한 담배 냄새가 나는 키 큰 소년. 아직 앳된 얼굴이 그를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폴 베를렌느 씨? …아르튀르 랭보?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손이 당겨져 와락 끌어안긴데다 등이 팡팡 쳐지기까지 한 베를렌느가 반사적으로 당황스러운 웃음을 흘리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저랬었나.”
폴과 처음 만났을 때 저렇게 어린애처럼 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분명 더, 멋진 걸음걸이로 다가가서…… 그러지 않았나? 생각하다 보면 그들이 랭보의 앞을 지나쳤다. 이쪽이야, 다정한 목소리가 건널목을 따라 스쳐가며, 그들이 지나간 자리로 기차가 증기를 뱉어내고 역을 떠났다.
석탄을 태운 검은 연기가 한바탕 맑은 공기를 흩트려 놓았다. 숨을 쉬는 데 전혀 지장은 없었지만 반사적으로 기침이 나와 콜록이며 랭보가 눈을 감았다가 살며시 떴다.
어두운 푸르름에서 주홍빛으로, 이윽고 아침 빛깔로 변하고 있는 하늘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해가 막 떠 서늘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기차는 느리게 속도를 낮춰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기차를 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차례차례 탑승하고 있는 사람들 틈에 끼지 않은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뜨는 해가 너무 강렬해 얼굴 윤곽만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잔잔한 바람에 베이지색 코트와 그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한 손에 여행 가방을 들고 다른 손에 기차표를 쥐었다. 막 도착한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 대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플랫폼에 달린 거대한 시계를 보며 시간을 가늠하고 있었다.
멀리서 비쩍 마른 남자가 사람들을 피해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낡은 여행 가방을 들고, 오래된 코트를 입고 한 손에는 힙 플라스크를 들고 있었다. 눈가에 짙게 내려앉은 다크서클, 멋대로 자라게 내버려 둬 덥수룩한 머리카락, 옅게 상흔이 남은 손등. 어깨가 부딪힐 때마다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시선을 피하는, 어떤 곳에서도 불화하는 이방인, 폴 마리 베를렌느.
그는 랭보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보일 리 없을 텐데. 역시 눈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랭보의 웃음소리를 쫓아, 이제는 없는 허상을 따라서, 막 출발하려는 열차를 아무것이나 올라타려다…
“…그 열차가 아니에요.”
“아…….”
“표도 없으시잖아요.”
누군가 그의 뒤에서 타박하는 말을 건넸다. 방금 전 아무 계획도, 심지어는 표도 없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기차에나 올라타려고 해 놓고, 베를렌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듯 계단을 밟은 발을 물리고 뒤를 돌았다. 역무원이 이상스런 눈으로 쳐다보다 기차에 탑승했다.
빠아앙-
기차가 출발 경적을 울렸다. 베를렌느는 제 뒤에 있는, 이제는 아이라고 부르기에는 명백히 실례인 청년을 바라봤다. 덥수룩하게 긴 앞머리가 눈을 거의 덮고 있었고 때문에 그는 멍하니 울고 있었다. 들라에는 그의 눈을 바라보다 세워둔 가방을 옆으로 물리며 자리를 내어주었다.
“아무 열차나 상관 없었는데.”
툭 던진 말에 들라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무 열차나 상관 없으면, 가서 뭘 어쩌시려고요. 예의 없이 쏘아붙인 말이 들려도 베를렌느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허공을 보고 있었다.
플랫폼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환한 웃음으로 가족을 맞이하는 청년,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노부인, 온갖 사람들이 섞여 역사가 떠들썩하게 울리는 사이에서 죽음보다 적막한 정적이 흘렀다.
“…왜 마음을 바꾸셨어요?”
“그 악마가 실패했다는 걸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고.”
말로 서로의 생각을 표현하고 감정을 나누는 것이 대화라면, 그와는 전혀 대화라는 것이 진행되지 않았다. 날카로운 투로 뱉어내는 말에 들라에가 더 이상 말할 가치가 없다는 듯 고개를 먼저 돌렸고, 베를렌느는 술을 마셨다. 세상에서 가장 랭보를 잘 아는 두 사람의 사이에 불편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이제 가는 거니?”
“네, 곧 손이 모자를 때라 더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서요. 마음 같아서는 랭보가 깨어날 때까지 있고 싶지만……. 잘 부탁드릴게요.”
“계속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 들라에. 나아지면 편지나 전보를 보낼게. 조심히 가.”
“네. 베를렌느 씨도 몸 건강히 잘 지내세요.”
철문이 닫히면 집 안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베를렌느는 손님이 떠난 자리에 남은 흔적을 치우고 옷가지를 간단히 정리했다.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여야 갑작스런 빈틈에 생각이 끼어들지 않아서였다.
카우치에 불편하게 구겨져 잠들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깨고 나면 늘 그러던 것처럼 불안은 예고 없이 찾아왔고, 랭보가 쭈욱 잠든 이후로는 더욱 거세게 아우성치곤 했다. 멀쩡히 뛰고 있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랭보의 옷자락 위에 손을 얹어보았다.
손 밑에서 두근거리며 울리는 고동이 아직은 살아있다고 말할 때, 베를렌느는 조금 안심했고 왜 깨어나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이 다시 올라왔다.
물론 랭보는 가끔 놀랄 만큼 오래 잤다. 그러니까, 성장기 청소년 치고도 오래. 자고 일어나면 키가 일 센티 정도 커진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이렇게 오래 잤던 적은 없었다. 머리에 난 상처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고(물론 셔츠를 흠뻑 적신 피 때문에, 베를렌느는 거의 기절 직전의 상태였다) 혼자서 호흡하거나 눈동자를 움직이는 것에도 문제가 없어 보인다는데 왜 깨어나지를 않는지. 줄리엣의 물약을 훔쳐 마셨는지, 아님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되어버린 건지.
“…랭보.”
잠들었음에도 여전히 자신보다도 생명력이 넘치는 소년의 앞에서 베를렌느가 마른세수를 하며 작은 의자에서 일어나 선반으로 갔다.
술이 간절했다. 알코올에 이성을 맡기고 형편없이 취해 모든 불안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선반에 주욱 놓인 술병이 빈 것은 아니었으나 베를렌느는 깨어나지 못하는 어린 환자를 옆에 두고 술을 마실 정도의 인간 말종은 아니었다.
대신 그는 랭보의 파이프를 물었다. 울음 섞인 한숨을 내쉴 무언가라도 없으면 속이 타들어 갈 것 같았기에, 연기를 입 안에 깊이 빨아들였다 창밖으로 뱉으며 시간을 보냈다. 수북이 쌓인 재 위로 베를렌느가 다시 재를 털어냈다.
간병에는 적지 않은 돈이 필요했다. 오래 자리를 비울 수가 없으니, 교정을 봐줄 원고를 집으로 가져와 랭보의 옆에서 작업을 진행했다. 담뱃재를 털어내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원고를 넘기는 손 역시 느려졌다.
낡은 전깃등 불빛을 받고도 환히 빛나는 머리칼이 이불 위에 흐트러졌다. 색색 숨 내쉬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채웠다. 종이 더미를 탁자에 대고 몇 번 두드려 열을 맞추면서도 베를렌느는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지런히 종이를 놓아두고 다시 작은 의자에 앉아 손을 쥐고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랭보의 모습이 너무나 아득하게 보여 그에게서 어떠한 신성을 찾아내는 밤이 있었다.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목소리에서, 손길에서, 그의 눈빛에서도 가끔은 전율이 일었다. 잠든 랭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날개가 부러져 하늘에서 추락했다던 어느 천사 이야기를 생각하기도 했다.
이럴 때에야 나의 작은 신은 비로소 인세 人世에 내려와 한낱 인간의 손에 잡혀주는구나.
자신은 마법을 부릴 수도,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는 무력한 인간이었기에 때가 되면 무엇이라도 먹이고, 손을 잡고 기도하듯 또 고쳐 쥐며 잠든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홀로 밤을 지날 때면 후회가 밀려들어 왔다.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어.
아무리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고 해도, 랭보는 아직 어린 애였다. 보호자가 필요한 나이. 사실은 일이 정말로 바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애의 친구를 다시 보고 있자니 일전에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것이 조금 껄끄럽고, 약간은 부끄러워서…
빌어먹을 베를렌느, 네가 다 망친 거야. 선뜩한 목소리가 귀에 꽂히듯 들렸다. 베를렌느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겨우 몇 발자국을 떨어트리며 목소리에게 대꾸했다.
“그만해, 그만… 나도 알아.”
너 때문에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랭보가 네 알량한 자존심을 정말 몰랐을까? 넌 그 애를 위험으로 몰아넣었어. 차라리 네가 대신 맞았어야지.
더욱 기세를 높여 자신을 공격해오는 목소리 탓에 베를렌느가 바닥을 기었다. 그를 둘러싼 목소리가 하는 말 중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것이 베를렌느를 더욱 괴롭게 했다. 그것들에게 공격적으로 맞서려는 듯 눈을 번뜩이다가도 죄책감이 자극되면 끄으으 속으로 앓는 소리만 흘렸다.
아, 이렇게 한참을 정신 놓고 허우적거리고 있다 보면 다정한 손길이 닿곤 했었는데.
그러나 기꺼이 손길을 내어줄 주인공은 한창 꿈의 마수에 빠져 있었다. 베를렌느는 한참이나 마룻바닥을 손톱으로 까드득 긁으며 목소리를 견뎌내다가, 결국 컵을 하나 깨 먹고 손에서 피를 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푸른 바람에 머리칼이 부스스하게 뒤로 넘어갔다. 런던에 살며 비교적 자주 보게 되어 이전보다 감흥이야 적어졌지만 여전히 바닷가와 항구 산책은 랭보의 마음에 드는 일 중 하나였다.
특히 베를렌느가 뒤에서 느긋하게 따라오고 있는 날에는, 그의 정신 상태 역시 나쁘지 않다는 뜻이었으므로, 기분이 더욱 좋았다. 뒤를 돌아보면 그가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마구 손을 흔드니 희미하게 웃으며 마주 흔들어주었다. 손을 꼭 잡고 걸으려 했는데, 오늘은 그 정도는 아닌가 보다.
물결이 둑을 집어삼킬 듯 부딪혔다가 사그라들었다. 바다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갈매기, 아기 울음소리 같은 갈매기 울음소리, 배가 한 척도 없는 런던의 바다, 쓰레기가 떠다니지 않는 런던의 항구.
“어라.”
런던은 늘 사람이 많았고, 떠나는 배와 들어오는 배가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거나 가끔은 부딪힐 정도로 항구가 항상 바빴고, 해무와 배에서 나온 연기가 구분되지 않을 만큼 가득했다. 템스강에서 떠내려온 쓰레기와 조업 후 남은 잔해물들이 둑 옆에 아무렇게나 더미를 이루고 있는 도시였다.
이곳은 지독하게 사람이 없었고, 나무배가 물결에 따라 흔들리며 부두에 부딪히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렸다. 그리고 갈매기 소리. 갈매기는 정말 어디에나 사는구나. 그는 이 장소를 안다. 마르세유에서 커다란 배를 타고 며칠을 가면 닿을 수 있는, … 그러나 랭보는 아직, 이 장소를 모른다.
랭보는 고개를 돌려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고 있던 베를렌느를 바라보았다.
베를렌느는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깐 새에 몇십 년은 늙은 것 같은, 아니 정말로 나이가 들어 뺨 밑이 푹 꺼지고 눈가에는 주름이 생긴 모습이었다. 아주 오래 해를 보지 않은 사람처럼 피부는 창백하게 희었다. 늘 매고 다니던 크라바트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고, 일부분이 튿어진 코트를 입고 서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누군가 있다 떠난 것처럼 모래사장엔 돌아간 발자국이 한 쌍 보였다.
시선을 따라 바다로 고개를 돌리면 붉은 태양이 지고 있었다. 날씨가 아주 맑아 석양을 품은 수평선이 선명하게 보였다. 둑에서 내려 그가 서 있는 바닷가로 가는 동안에도 베를렌느는 가만히 서 눈을 감고 석양을 온 몸으로 맞이했다.
파도가 치는 끝부분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 베를렌느가 한참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공교롭게도 랭보는 그곳에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런 착각이 들었다. 실은,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있지 않았다.
“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랭보는 웃었고, 베를렌느는 희미하게 웃다가 이내 울었다.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떨어트리다가 표정이 일그러졌고, 이내 아이처럼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렸다. 바지에 젖은 모래가 달라붙는 감각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랭보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울보 폴. 함께 지내는 동안 그는 여러 가지 이유로 울었는데, 본인은 우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했다. 고개 들고 나 보라니까, 겨우 설득을 시켜도 차라리 어깨에 고개를 묻으면 묻었지 결코 시선을 맞추지는 않았다.
어쨌든, 다가가 닿을 수 없으니 감싸줄 수도 없었다. 랭보는 그저 그를 가만히 기다렸다. 그가 웃고, 울고, 결국엔 울음을 멈추기까지 아주 오래, 파도에 발을 묻은 채.
해가 완전히 저물어 푸른 기운이 하늘을 덮을 때가 되어서야 베를렌느는 눈물을 그쳤다. 그제서야 랭보는 그의 옆에 앉았다. 그의 숨소리는 희미했으며 간헐적으로 아직 그치지 못한 울음 탓에 어깨가 떨리고 있었으나 그것은 분명한 생명의 징후였다. 랭보는 그것에 충분히 만족했다.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면 바다는 푸르다 못해 점점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제야, 태양을 따라 어둠이 찾아오는 이곳은 랭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폴, 기운 내. 들리지 않을 목소리를 전하며 어깨를 톡 치면 멍하니 파도가 오는 곳을 보고 있던 베를렌느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랭보가 자리를 옮긴 그곳엔 이미 아무것도 없었다. 괜히 온기가 남은 것 같은 옆자리를 조심히 쓸었다가, 베를렌느가 흐리게 미소 지었다.
한산했던 바닷가를 뒤로 하고 걸을 수록 풍경이 바뀌었다. 느리게, 천천히 걷고 있음에도 주변의 풍경은 몇 배로 더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랭보는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는 사람처럼 걸었다. 걸음은 그를 길고 긴 터널로 인도했다.
터널 끝에 초록이 보였다.
소년은 그곳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멀리, 아주 멀리까지.
눈을 뜬 이후, 자신이 꼬박 이틀을 잠만 잤다는 걸 안 랭보는 정말로 진통제를 놓지 않겠다고 생떼를 부렸다. 다리를 잘라낸 환자에게서 그런 힘이 어떻게 나오는 거냐며, 병원은 한동안 그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가장 친한 친구도, 가족들도 그의 고집을 결국엔 말리지 못했다.
인생은 우리 모두가 견뎌야 하는 희극이야. 난 이 희극의 마지막을 잠으로 보내고 싶지 않아.
들라에는 거친 일을 많이 해 또래보다 빨리 주름진 그의 손을 잡고 조금 울었다. 랭보가 부드럽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말했다시피 이건 희극이니까. 절대 파멸로는 끝나지 않을 거야.
진통제 투약을 중단한 이후 그는 조금 더 고통스러워 보였다. 통증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는 시간에는 창 바깥을 내다보거나 시집을 읽었고 몸 상태가 좋은 날에는 나가서 걷기를 원했다. 가끔은 자신의 여동생과 함께, 그리고 또 가끔은 자신의 유일한 친구와 함께 병원 인근의 냇가를 거닐었다.
랭보는 원래 모든 것을 알던 것처럼 익숙하게 쓰는 경향이 있었는데, 목발 역시 그랬다. 평생 목발을 짚고 살아온 사람처럼 걸었다.
“템스 강 말이야.”
“응?”
들라에는 늘 뜬금없이 말을 꺼내곤 하는 자신의 친구를 바라봤다.
“템스 강. 영국의 수도를 관통하는 강 있잖아. 셰익스피어며 누구며 온갖 예술가들이 그렇게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는 강. 그 강이 바다로 바로 이어지거든. 중간에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있어. 대리석으로 지어져서 아주 튼튼하지.”
“알고 있어. 런던에 오래 머무른 적은 없어서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그게 갑자기 왜?”
“그 강을 처음으로 봤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아? 물이 엄청나게 더러웠어. 공장에서 나오는 폐수며, 각종 쓰레기… 계속해서 꿈꾸던 것과는 전혀 달랐어. 이 물이 그대로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는 걸, 그래서 바다 또한 그렇게 더러울 것이라는 걸 믿고 싶지가 않았어. 하지만 믿지 않는다고 그것이 실존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곧 깨달았지.”
바다를 본 적도 없던 소년이 감당하기엔 조금 어려운 사실이었다며, 랭보는 웃음기를 섞어 말했다.
“그래도 템스 강의 크기만큼은, 샤를빌의 작은 냇가와는 비교가 안 될 거야. 그렇지?”
“맞아. 원래 템스 강의 어원이 웨일즈어로 어둡다는 뜻인 걸 생각해보면, 그 어둡고 더러운 강물은 이름에 충실했던 것 같기도 해.”
“어둡다는 뜻이 있는 줄은 몰랐네.”
“그 앞엔 완공된 지 얼마 안 된 시계탑이 있어. 기차역에 놓인 시계나, 교회 종탑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크기야. 그 앞을 지나가면 15분마다 종이 쳐. 꽤 멀리까지 들려서 시간을 맞추는 데 유용하고.”
“지금은 빅 벤이 세워진 지 한참이나 지났어, 랭보. 이제 그런 시계탑은 파리에도 많아. 거기다 그 강도 여러 정화 사업을 거쳐서, 이제는 꽤 물이 맑아졌다고 들었어.”
“맞아.”
짧은 긍정의 말을 뱉어낸 랭보는 냇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모든 건 변하는구나.”
꿈 속 터널에서 빠져나와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누워서 얌전히 이불을 덮은 채, 창문으로 쏟아지는 빛이 눈부셔 미간을 찌푸렸다.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리려는데, 손에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면 손에 얼굴을 기댄 채 엎드려 자고있는 이의 모습이 보였다. 어두운 머리칼이 부스스하게 흩어져 있었고 몸에선, 맙소사. 짙은 담배 냄새가 났다. 왜 이렇게 누워있는 거야. 피식 웃으며 머리칼을 살살 넘겨 쓰다듬어주면 약하게 앓는 소리를 내며 베를렌느가 고개를 슬 돌렸다. 눈 밑에는 짙게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폴.”
“…….”
“포올, 마리.”
“흡,”
기묘한 소리를 내며 베를렌느가 고개를 들었다. 엎드려 잠든 탓에 어깨며 쇄골이 저려왔다. 언제 잠들었지, 분명 교정 원고를 읽고 있었는데……. 며칠이나 거리를 적신 비 때문에 새벽에는 창틀과 계단이 살짝 얼고, 해가 뜨면 녹기를 반복해 창틀에 고드름이 생겼다. 해에 비쳐 맑게 빛나는 고드름에서 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제 머리를 쓸어내는 손길. 천천히 시선을 돌리면 어느샌가 눈을 뜬 랭보가 있었다.
“오랜만이야.”
한동안 목소리를 내지 않아 잠겨 갈라진 목소리로 느긋하게, 천천히 말을 잇는다.
“나 아주 긴 꿈을 꿨어. 나, 당신을 보고 왔어. 그리고 아프리카, 아프리카의 붉은 태양에 비춰지던 당신의 말라빠진 두 다리. …그건 꿈이었을까?”
랭보, 목이 메인 소릴 내뱉던 베를렌느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내 이불 위로 투명한 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랭보가 손을 뻗어 마음고생 탓에 더 마른 것 같은 앙상한 손 위로 겹쳐 쥐자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울보가 다 됐어, 폴.”
울지 말라고 건넨 장난스러운 말에도 베를렌느는 그저 잡은 손을 뺨에 대어 온기를 확인하며 한참을 울었다.
그가 진정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무슨 말을 해도, 어린애처럼 울기만 하는 모습에 결국 랭보가 몸을 일으켜 그를 끌어안고 천천히 토닥여 줄 수 밖에 없었다. 베를렌느는 그렇게 퉁퉁 부은 눈으로 스프를 끓였고, 멀쩡하게 일어나 테이블에서 먹을 수 있다는데도 한사코 옆에 앉아 스프를 떠먹여 주었다. 뭐, 솔직히 싫지는 않았으므로 랭보는 그가 호호 불어 식혀준 스프를 아기 새처럼 받아먹었다.
현관에 가까이 가기만 해도 종이를 넘기던 그에게서 묘하게 시선이 따라붙었다. 왜 그래? 하면 아니라며 어물거리며 대답이 따라붙었다. 신경을 끄고 외투를 챙기고 파이프를 집어 들면 그제서야 옆으로 다가와 묻는다.
“나가려고?”
“오래 누워있었으니까, 몸이 조금 찌뿌둥하기도 해서.”
“…그래도 아직 조심해야 하지 않아?”
“걱정 마, 금방 들어올게.”
랭보가 안심하라는 듯 베를렌느의 어깨를 톡톡 치면, 머뭇거리던 베를렌느가 외투를 챙겼다.
“같이 가게?”
“우체국도 들러야 하고, 네 친구에게 연락도 넣어야 하니까.”
“아, 들라에. 들라에도 걱정이 많았겠어. 두 배로 걱정을 받았네.”
“계속 같이 있어 줬어.”
“그 애라면 그랬겠지. 그래, 같이 나가자.”
바깥은 벌써 봄이 만연했다. 눈 녹은 물이 떨어지는 곳에는 새싹이 돋아 있었다. 분명 마지막으로 나왔을 때는 가장 두꺼운 외투를 꺼내고 목도리까지 둘러도 추위가 남아 있었는데, 어느새 겨울이 몰아내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아직 손은 시렵네. 손을 꼼지락대고 있으면 어느새 조심히 손을 쥐어오는 움직임이 있었다. 모르는 척 조용히 손을 쥔 베를렌느를 보며 랭보는 크게 웃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엄지로 손등을 가만 매만졌다. 사람이 많은 거리에서는 그가 어느새 손을 스르르 풀어냈지만 괜찮았다.
우체국에 들러 전보를 보내고, 식료품 가게에 들러 저녁거리를 사고, 둑을 건너 바닷가 산책을 했다. 그러고 보면 꿈에서 여길 걸었던 것 같은데, 꿈이라 그런가?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당신이랑 여길 산책했어. 그리 말하는 랭보 옆에서 폴은 고개만 끄덕였다.
이튿날에는 혹시 모르니 한 번 와달라고 부탁한 의사에게 몸 건강 관리에 유의하라는 잔소리를 들었다. 폴은 정말 감사하다며 고개를 몇 번 꾸벅였다. 또, 며칠 후에는 전보를 받았던 들라에에게서 특별히 조심하라며 신선한 채소 꾸러미를 소포로 받았다. 답장을 써 보냈다.
늘 고마워, 너의 진실된 친구로부터.
“편지 보내고 왔어.”
“아, 고마워, 폴.”
아쉽게도 일어난 직후 꿈의 내용은 전부 잊어버렸지만 잔상이 남았다며, 랭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난 직후부터 공격적으로 글을 썼다. 연필을 들고 한참 고민하다 수첩에 적어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베를렌느는 내심 이제서야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아 안심이 됐다. 이 일상을 깨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일을 늘렸다. 그동안 누워있는 랭보를 지켜보느라,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받았더니 생활비가 부족해진 탓이었다. 일을 늘리며 자연히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지만 그래도 집에 돌아오면 랭보가 뜬 눈으로 그를 맞이하며 본인이 쓰던 것을 보여주는 평온한 일상이 있었다.
어느 늦은 저녁, 베를렌느가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날에도 랭보는 글 쓰는 것 외에 아무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점심은 겨우 챙겨 먹은 듯했지만 저녁거리를 하라고 남겨놓은 빵에는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왔어? 잠시 종이에서 시선을 떼고 일어서 랭보가 베를렌느를 반겼다.
“응, 다녀왔어. 오늘은 좀 어때? 저녁도 안 먹고.”
“붉은 석양을 봤는데 이거다, 하는 게 딱 떠올라서. 덕분에 한 장을 꼬박 붉은 색에 관해 썼어. 붉은 태양, 석양에 반발해 깨어지는 햇빛 조각, 해가 저무는 숲을 헤집고 도망치는 토끼와 쫓는 여우. 그걸 뒤쫓다 보니 이 시간이 된 줄도 몰랐네.”
어떠한 일이 있었든 랭보가 열심히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일을 늘린 이후로 피로가 누적되긴 했지만 랭보의 웃는 모습을 보니 그런 것 쯤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는 가방을 내려두고 코트를 옷걸이에 걸어둔 이후 피곤한 몸을 카우치에 기대어 앉았다. 어흐…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저씨 같아, 폴. 랭보가 웃으며 대꾸하곤 다시 책상에 앉았다. 사각사각 연필이 종이에 닿아 닳는 소리가 들리다가,
툭.
“아, 또 부러졌네.”
글을 쓰는 테이블에서 식사도 하고, 다른 업무도 보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연필을 바닥에 떨구게 되었다. 글이 잘 안 써질 때 랭보가 신경질을 내며 집어던지는 경우도 있었으니 연필이 잘 부러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랭보는 서랍을 열어 작은 칼을 찾았다.
“폴, 연필 깎는 칼 어디 뒀어?”
“그쪽 서랍에 없어? …잠시만.”
카우치에 녹아든 몸을 겨우 일으켜 베를렌느가 비척비척 침실로 향했다. 아마 여기서 연필을 깎고 또 어디 널브러트렸겠지. 침대에선 연필을 깎지 말라고 그리 말을 하는데도 랭보는 아무 곳에서나 연필을 깎았고, 자고, 먹었다. 협탁 밑에 떨어진 칼을 찾아낸 베를렌느가 이내 테이블로 돌아왔다.
“줘 봐, 내가 깎아 줄게.”
“나도 연필은 혼자 깎을 수 있어.”
너무 과보호 하는 거 아냐, 폴? 하고 소년이 빙긋 웃었으나 베를렌느는 손을 내민 채 가만히 있었다. 웃음을 흘리며 칼을 건네면 사각사각 연필을 깎는 소리가 이어졌다. 뾰족하지 않아도 되니까,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길게. 랭보가 연필을 깎는 방식을 알고 있었기에 그에 맞춰 손을 놀렸다. 그러다 쌓인 피로에 눈을 잠깐 감았다가…….
“…아야.”
“어어, 베였어?”
순식간에 여린 살갗 위로 핏방울이 동그랗게 올라왔다. 약간의 따끔함, 쓰라림이 이어지고, 랭보가 눈을 먼저 동그랗게 뜨더니 손을 잡아챘다. 랭보? 의아함에 베를렌느가 이름을 불렀다. 랭보가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곤 베인 손가락을 입에 물어 피를 핥았다.
“으, 뭐 하는 거야.”
이렇게 하면 금방 그쳐. 손가락을 입에 문 채 웅얼거리며 말하는 목소리에 그가 얌전히 손을 맡겼다. 말캉하고 뜨거운 감각이 손끝에 돌았다. 랭보는 시선을 내려 제가 문 손가락을 살폈다. 확실히 랭보가 다치기 전보다 살이 빠져 손가락 뼈가 더 도드라진 모습, 그리고 종이에 베인 상처들이 보였다. 종이를 많이 만져서 그런가. 랭보는 베를렌느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정확히 뭔지도 몰랐고, 물을 생각도 없었지만 그렇게 짐작하며 한 손으로 손등을 살살 더듬었다. 종이에 베인 자국 말고는 흉 같은 것이 없이 곱게 뻗은 손이었다.
“…….”
“……저기, 랭보.”
“응?”
“읏, ……이제 그만해도, 돼….”
한숨 소리에 고개를 들면 베를렌느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 있었다. 손을 쥐고 있느라 몰랐는데, 손끝도 혀를 움직일 때마다 묘하게 움찔거리는 모습이었다. 무어라 말을 하려 랭보가 입을 벌리는 틈을 타 베를렌느가 급히 손을 거두었다. 공기가 순식간에 어색하게 느껴졌다. 음, 베를렌느가 어색함을 떨쳐 보려 목소리를 가다듬었지만 빨개진 얼굴을 숨기지는 못했다.
“…폴. 나…….”
“랭보, 그, 자러, 자러 가자. 늦었어.”
베를렌느가 급히 말을 끊어냈지만 랭보는 그에 아랑곳 않고 베를렌느의 눈을 계속해서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베를렌느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색할 뿐만 아니라, 속으로는 조금 죽고 싶었다. 고작 손가락을 핥은 것만으로! 아무리 지난 몇 주간 신체적인 교류가 없었다곤 하지만, 병상에 누워있다 털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이에게 느낄 감정은 아니었다. 그 정도로 낯짝이 두껍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어서 이 자리를 회피하고 싶었다. 서둘러 몸을 돌리는 베를렌느의 손을 랭보가 조심히 잡았다. 움찔, 베를렌느의 어깨가 튀었다.
“나, …당신이랑 키스하고 싶은데.”
“…….”
해도 돼? 베를렌느를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전깃불이 반사되어 금빛으로 빛났다. 베를렌느는 도무지 이 눈을 한 아이에게 거절하는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잡은 손을 뿌리치거나, 그렇다고 먼저 다가가지도 못하며 한참 망설이기만 하자 소년의 인내심이 먼저 끊어졌다. 몸을 일으키고, 베를렌느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돌려세우며 다시 물었다. 키스, 해도, 돼?
베를렌느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기울여 소년의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을 보냈다. 뒤로 조심히 떨어지려는 것을 쫒아 랭보가 다시 입술을 맞대었고, 오랜만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연거푸 입 맞추었다.
입술을 문지르고 조심히 물었다가 두드리면 그의 입술이 모르는 체 열렸다. 소년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등허리를 한 손으로 감싸면서 다른 손으로는 뺨을 그러쥐고 말캉한 혀를 장난스럽게 깨물어줬다. 어깨가 약하게 튀며 으응…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고른 치열을 조심스레 훑고 여린 살을 지분거리면 그의 숨소리가 조금 달라지는 지점이 있었다.
입맞춤이 이어지며 타액이 엉기는 소리와 숨소리가 정적을 가득 채웠다. 손 아래에서 베를렌느의 뺨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지자 랭보가 작게 웃었다.
“…왜 웃어?”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소년은 대답 대신 다시 입술을 물고 좋은 소리가 나는 곳을 꾸욱 문질렀다. 힉, 숨이 잘게 끊기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살짝 비틀거렸다. 몸을 돌려 책상에 앉히며 랭보가 자연스럽게 올라타듯 몸을 숙였다. 한쪽 팔로 책상을 짚고 제 쪽으로 기우는 소년의 몸을 받아내던 베를렌느가 침음을 흘렸다.
글이 길어져서 잘리는 듯 하여 상/하로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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